교회 언론-출판 발전 이끈 선각자
일제 압박-재정난 견디며 사회복음화에 헌신
‘가톨릭 청년’ 창간, ‘경향신문’ 사장으로 활동
“고맙습니다.”
1979년 6월 14일 성모병원. 윤형중 신부는 병상에 둘러 선 지인들에게 세 번 이나 거듭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선종할 때까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가톨릭 사상의 선구자이자 교회의 정신적 대변인으로, 때로는 정의의 투사로 헌신했던 윤형중 신부는 그를 아는 모든 이들과 죽음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생을 마쳤다. 20세기 한국 교회와 사회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위인의 유언으로는 너무나 간결하고 겸손한 마지막 말. 그런데 고맙다는 말을 세 번이나 되뇌이고도 모자랐을까.
그는 평생을 어둠 속에서 보내던 이들을 위해 두 눈을 남겼다.
해박한 신학지식을 바탕으로 교회와 사회에 밝은 빛을 비추던 그는 죽어서까지도 세상의 빛으로 남았다.
교회 언론·출판 활동 주도
1903년 4월 29일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진동에서 태어난 윤형중 신부는 5촌 당숙인 신학생 윤의병(바오로)의 영향과, 어머니의 권유로 1917년 9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한다. 1930년 사제품을 받은 윤신부는 1933년 1월 서울교구 출판부 보좌로 임명되면서 교회 언론 출판의 창달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된다.
윤신부는 같은 해 6월 장면, 장발, 정지용 등과 함께 ‘가톨릭 청년’을 창간하고 편집장에 취임했으며, 가톨릭청년이 폐간된 후인 1937년부터는 ‘경향잡지’의 편집장으로도 활동했다. 경향잡지 편집장과 서울교구 출판부 부장으로 일하던 1939년에는 조선천주교순교자현양회의 결성을 추진하기도 했다. 윤신부는 일제시기부터 순교자 현양에 앞장 선 선각자로도 평가를 받는다.
이후 윤신부는 1945년 5월 폐간되었던 경향잡지를 1946년 8월 속간하고 주필 겸 발행인으로 일했으며 같은 해 10월 6일 ‘경향신문’이 창간되자 부사장을 겸임했다.
또 1947년 속간된 가톨릭 청년의 발행인을 1960년까지 맡기도 하는 등 해방 전후 교회 언론이 발전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밖에도 윤신부는 1954년 가톨릭대학 초대 의학부 부장에 취임해 1년간 재임했으며, 1961년에는 경향신문사 제3대 사장으로 취임해 1962년까지 활동했다. 1966년 은퇴한 윤신부는 이후에도 유신 독재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에 힘을 기울이다가 1979년 6월 15일 지병인 폐암으로 선종했다.
윤신부의 저서로는 ‘종교의 근본문제’(1952년), ‘진리의 증언’(1959년), ‘사말(四末)의 노래’(1972년), ‘상해 천주교 요리’(1957년) 등이 있으며, 유고집으로 ‘진리의 빛 속을'이 간행됐다.
가톨릭의 투철한 ‘논객’
이처럼 본당 사목보다는 교회 언론?출판 활동을 적극 주도한 윤신부는 해박한 신학지식을 바탕으로 가톨릭을 반대하는 누구와도 맞설 만큼 가톨릭정신이 투철한 대표적인 논객이었다.
1933년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좌익 문인 임화 등과 논전을 벌였으며, 특히 1956~1957년에 함석헌과 ‘사상계’에서 벌인 논전은 유명하다.
윤신부는 1955년 11월 불교도였던 최남선을 개종시키는 등 교리강좌를 통해 많은 지성인을 교회에 귀의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윤신부는 또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우고 신앙적으로 방황하던 한 중학생에게 하느님과 영혼의 존재 증명을 설명해 감동을 주기도 했다. 광복 직후 사순절특강 자리에서 윤신부를 만나 깨달음을 얻은 까까머리 중학생은 2006년 추기경에 서임된다.
정진석 추기경은 윤신부에게 들었던 강의의 기억을 살려 과학으로 신앙을 논증하는 내용의 책 ‘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2003년)를 펴내기도 했다.
가톨릭을 수호하고 변론하는 데는 너무나 철두철미해 ‘가톨릭 보수’라는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윤신부는 소외당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 사랑 실천에도 모범을 보인 목자였다.
윤신부는 1967년 성모병원 중앙 안은행에 최초로 헌안을 등록했으며 윤신부의 안구는 사후 시력을 잃은 환자에게 이식됐다.
1974년에는 유신 독재에 반대하며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해 상임대표위원을 맡았다.
이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은 윤신부의 장례미사에서 “신부님이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시고 한 때 그 대변인이 되신 것은 어떤 정치적인 야심이라든지, 사회적 명성에 대한 욕망에서가 아니다”라며 “오직 이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시면서 억눌리고 약한 자, 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라도 대신 되시겠다는 사랑에서였다”고 이야기했다.
윤신부는 일제의 압박과 재정적 어려움이라는 고난의 여정을 묵묵히 감내하며 말과 글로써 복음을 전파했다. 교회 어느 누구보다도 존경 받으며 교회사에 한 획을 차지했던 윤신부의 마지막 인사가 너무나도 겸손한 ‘고맙습니다’였고 ‘용서’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내가 누구의 마음을 상해 준 일이 있으면 진심으로 사과하는 바이니 용서해 주시고, 내가 누구에게 용서해 줄 것이 꼭 있다면 진심으로 용서하여 줍니다. 이제 나는 먼저 떠나갑니다.’ (윤형중 신부의 유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