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청주교구 초대교구장 파 지 주교 유해, 교구 성요셉공원에 이장

이우현 기자,전인재 대전지사장
입력일 2011-12-07 수정일 2011-12-07 발행일 2011-12-11 제 2774호 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황무지 일궈 교구 기초 닦으신 분
6·25 후 절망 빠진 사회 보듬어”
성당·공소 마련하고 성소 개발 등에 헌신
전후 구호사업도 힘써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11월 30일 성요셉공원에서 초대교구장 파 지 주교의 유해 이장미사·예식을 거행하고 있다.
청주교구 초대교구장 파 지(James Pardy·巴智·야고보) 주교가 다시금 교구의 품으로 돌아왔다. 청주교구가 지난 11월 30일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 본부에 묻혀 있던 파 주교의 유해를 교구 성요셉공원으로 옮겨온 것.

청주교구는 지난 2월 사제 평의회에서 파 주교가 은퇴 후 사용(1969년 6월~1973년)했던 현 교구청 내 경당 활용 방안을 논의하면서 유해 이장에 대한 의견을 발의, 3월 사제 평의회와 함께 각 지구 신부들의 의견을 모아 이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교구는 9월 6일 교구 총대리 이범현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초대교구장 파 지(야고보) 주교 이장 위원회’를 열고 이장 준비에 들어갔다.

교구는 11월 29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교포사목을 마치고 돌아오는 박치영 신부가 유해를 옮겨오도록 했다. 당일 도착한 유해는 파 주교가 사목활동을 펼치던 구 교구청 자리에 세워진 ‘가톨릭청소년센터’에 잠시 머물렀다가 내덕동주교좌성당으로 이동했다. 내덕동본당에서는 오후 8시부터 교구 사제단, 수도자, 평신도 등이 모여 파 주교를 위한 연도를 바치며 교구의 기틀을 마련했던 파 주교의 사목활동에 대한 감사의 뜻과 현양의 마음을 전했다.

이튿날인 30일 오전 10시30분에는 유해를 교구 성요셉공원(충북 청원군 가덕면 시동리)으로 옮기고, 교구장 장봉훈 주교 주례로 이장미사 및 이장예식을 거행했다.

장 주교는 이장미사 강론에서 파 주교의 사목활동을 열거하고 “11월 29일 1958~1969년 11년간 사목하셨던 옛 교구청 자리에 세운 가톨릭청소년센터에 오신 파 주교님을 영접하며 드린 말은 감사하다는 말이었다”며 “파 주교님은 초대교구장으로서 황무지를 일궈 교구의 기초를 닦고, 교구의 기틀을 마련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장 주교는 또 “파 주교님께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우리 모습을 떠올리며 죄송하다는 말씀과 용서해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이제 우리 곁에 묻힌 파 주교님을 기억하며 파 주교님을 자주 찾아 봬야겠다”고 말했다.

파 주교는 1898년 미국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1918년 뉴욕 시립고등학교 졸업 후 메리놀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1930년 워싱턴 가톨릭대학원을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은 파 주교는 1932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돼 한국에 입국했다. 어학을 공부한 뒤 평안도 의주본당 주임 사제로 7년10개월간 사목했던 파 주교는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 총독부에 강제 투옥됐고, 이듬해 6월 강제 추방됐다.

이후 한때 미 육군 군종사제와 1946년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신학교 교장과 교육감 등을 역임한 바 있으며 1951년 군종 신부로 다시 입국해 거제도, 마산 포로수용소에서 사목했고, 1953년에는 장호원본당(현 감곡) 제6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이어 1953년 충청북도 감목대리구 설정과 동시에 초대 감목대리로서 사목했고, 1956년 메리놀외방전교회 총장으로 귀국했다가 1958년 충북 감목대리구가 청주대목구로 승격되면서 초대 청주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아울러 1962년 교구 승격으로 초대교구장에 임명됐고, 1969년 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파 주교는 1958~1969년 11년 간 청주교구에서 사목하면서 선교 사업의 기틀이 되는 성당 및 공소 마련과 성소 개발, 한국전쟁으로 인해 낙후된 지역사회 개발, 구호사업 등에 힘썼다.

퇴임 이후에는 1976년 귀국해 메리놀외방전교회 은퇴사제 휴양소에서 지내다 1983년 2월 15일 85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이우현 기자,전인재 대전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