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3) 존 헨리 뉴먼 추기경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입력일 2016-01-12 수정일 2016-01-12 발행일 2016-01-17 제 297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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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만 지켜주소서” 고백했던 겸손의 영성
성공회서 개종, 현대교회 신학에 나침반 역할
청년기까지 세 번의 열병… 회심 계기 삼아
시칠리아 여행의 내적 고백 담은 신앙시 특별
영국의 복자 존 헨리 뉴먼 추기경.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존 헨리 뉴먼의 재발견

영국의 복자 존 헨리 뉴먼 추기경(1801~1890)은 온전히 19세기에 자신의 삶을 보낸 인물이지만 오히려 20세기 이후 교회 학문과 신심에 있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남긴 정신적, 영적 유산은 현대교회의 삶과 신학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습니다. 2010년 9월 19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한 뉴먼 추기경 시복은 그의 교회와 신학에 대한 기여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교의의 발전’ ‘양심’ ‘신앙의 인식’ 등 주요 신학적 주제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은 새로운 상황에 처한 교회가 전통과의 연속성을 지키면서도 현대적 신학의 문을 열 수 있게 한 중요한 영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학자로서의 자의식을 앞세우기보다는 한 사람의 신앙인, 구도자, 목자로서의 진실하고 경건하며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충실했던 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매우 지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으면서도 결코 주지주의나 현학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찍부터 초대 교회 교부들에 깊이 매료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저술을 깊이 연구할 뿐만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을 신앙의 모범으로 삼아 배우고 닮으려고 했습니다. 사실 교부들에 대한 탐구는 옥스포드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25세에 성공회 사제로 서품되었던 그가 긴 영적 여정을 거쳐 1845년 10월 9일 45세의 나이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한 내적 동인이었습니다. 이후 가톨릭 사제이자 오라토리오 회의 책임자로서 빛나는 학문적 업적과 함께 많은 이들에게 삶과 인격으로서 감화를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비교될 정도로 영성적 깊이와 진실성을 담고 있는 그의 자서전 「나의 생애를 위한 변론(Apologia pro vita sua)」은 신앙과 삶의 모범이 되는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에 귀의한 후 성공회 측에서의 비난뿐 아니라 때로는 가톨릭 안에서도 개종의 진실성과 신학의 정통성에 대해 의심하는 시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인간적, 영적, 학문적 위대함은 1879년 교황 레오 13세가 추기경이라는 명예를 수여함으로써 교회내에서 공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뉴먼 추기경의 삶과 저술에 담긴 통찰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영적 지평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몇 번 더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다만 뉴먼이 젊은 시절에 쓴 너무나도 유명한 신앙시 하나를 음미하면서 그 시의 배경이 되었던 그의 젊은 시절 체험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칠리아, 열병 그리고 ‘구름기둥’

존 헨리 뉴먼은 유년기와 청년기 동안 세 번에 걸쳐 생명에 위협을 받을 만큼 큰 열병을 겪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심각했던 육체적 병들을 그 당시에 자신에 처했던 ‘영적 위기’(spiritual crises)와 그런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각고의 투쟁, 그리고 마침내 체험하게 된 회심들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습니다. 먼저 열다섯 살 때 겪은 열병은 그가 당시 영국 사상계를 지배하였던 무신론으로 이끄는 회의주의나 과학주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찾았던 체험과 이어집니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 때 만난 심각한 열병은 당시에 쏠리고 있던 과도한 주지주의와 지적인 야심에서 자유로워지는 회심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두 번에 걸친 몸과 마음앓이 보다 훨씬 심각하게 생명을 잃을 고비를 겨우 넘겼던 체험이 1933년 젊은 성공회 신부로서 처음으로 영국 땅을 떠나 지중해 지역으로 여행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때 겪은 심각한 열병과 회복, 그리고 그런 과정 중에 얻은 깨달음들은 그가 평생의 ‘삶의 태도’를 형성하게 되는 중요한 영적 순간이었고 훨씬 후에 가톨릭 교회의 품에 안기게 되는 순간을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

1932년 친구 프루드와 그의 아버지와 동행, 지중해로 여행을 떠난 존 헨리 뉴먼은 로마를 포함하여 ‘실제’의 가톨릭 세계와 문화를 민낯 그대로 접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 이듬해 봄, 동행자들이 모두 영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지방으로 여행을 계속하기로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장티푸스 추정의 열병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고비를 넘기고 계속해서 여행을 마친 후 팔레르모에서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가려고 배에 오릅니다. 팔레르모에서 마르세이유를 가던 중 보니파치오 해협에서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일주일 간 머물러 있을 때, 존 헨리 뉴먼은 자신이 시칠리아에서 겪은 내밀한 내적 체험을 비추어주는 세 개의 연으로 된 ‘구름기둥’(The Pillar of the Cloud)이라는 시를 씁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구름기둥’으로 제목을 삼은 이 시는 뉴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이끌어주소서’(Lead, kindly Light)라는 성가 가사로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인도하소서, 온유한 빛이여” 구절로 시작되는 이 시의 구절 하나하나는 에이버리 덜리스 추기경이 뉴먼에 대한 자신의 명쾌한 해설서에서 적절히 지적했 듯 앞으로 펼쳐질 그의 삶의 여정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과도 같습니다.

“인도 하소서, 온유한 빛이시여, 저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저를 이끌어주소서!

밤은 어둡고 저는 집에서 멀리 떠나왔으니, 저를 이끄소서!

저의 발을 지켜주소서. 나는 먼 곳을 보기를 원하지 않나이다, 다만 한 걸음이면 족하나이다.

저는 전에는 그러하지 않았고, 당신께서 저를 이끄시기를 기도하지도 않았나이다.

저는 그저 나의 길을 바라보며 선택하는 것을 좋아했나이다. 그러나 이제 나를 인도하소서!

저는 화려한 날을 사랑했으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만심이 저를 지배했나이다. 이제 지난 세월들을 헤아리지 마소서.

그토록 오래 당신의 권능이 저를 축복하시었으니, 앞으로도 여전히 나를 이끄시리라 확신하나이다.

늪지와 진창을 지나, 암벽과 급류를 넘어, 밤이 다 지나갈 때까지.

그리고 아침이 밝아, 제가 오래전부터 사랑했으되 그 사이 잃어버리고 말았던 당신의 천사가 미소지으며 맞이하리다.”

그가 이 시를 쓰고나서 자신의 출판되는 원고에 7년이 지난 후에야 수록한 것을 보면 그에게 이 시에 암시되는 내적회심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내밀한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먼 곳을 원하지 않고, 한 걸음이면 족하다는’ 그의 고백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 뉴먼의 젊은 시절, 평생을 비출 영성의 빛나는 순간에 만난 이 깨달음을 우리도 새해에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는 길잡이로 삼았으면 합니다.

다음 주에는 복음에 충실하다 나치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은 독일의 예수회 신부 알프레드 델프의 마지막을 살펴보겠습니다.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