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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복음살이]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6-05-17 수정일 2016-05-18 발행일 2016-05-22 제 2995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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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방위의 무력 사용?… 평화는 ‘비폭력’으로 추구해야
‘정의로운 전쟁’ 교리로 정립
 지속적 피해·최후의 수단 등  조건따라 전쟁 정당성 인정
 최근 이 교리에 의문 제기
 그리스도 가르침 바탕으로 ‘정의로운 평화’로 대치 요청
 교황청, 새 회칙 가능성 시사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 철교. 분단과 군사적 대립이 고착화된 한국에서도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한국교회는 비폭력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나라가 하는 일에 왜 그리 난리를 치는거야? 힘이 없으면 당하는 걸 몰라? 힘을 키워야지 힘을. 그놈들은 사람이 아니야!”

올해 여든이 된 박규현(베드로) 할아버지. 전쟁통 피난길, 14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헤어졌고, 그나마 같이 피란 왔던 더 어린 누이는 배 곯고 병 걸려 남쪽으로 내려온 지 채 6개월도 못 되어 죽었다.

어찌어찌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맺힌 한은 미움과 증오로 남았다. 그에게 북한은 힘으로 압도하고, 무력과 폭력으로 섬멸해야 할 대상이다. 그에게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나 촛불 시위를 하는 이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거나 사악한 빨갱이다. 그에게 평화는 힘으로 싸워 얻을 물건이다.

하지만 똑같이 북에서 피란 와서 할아버지를 만난 김월순(마리아·84)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가 못마땅하다.

“그 험한 꼴을 눈으로 전부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해요? 전쟁 나면 다 죽지,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노?”

할아버지의 맺힌 한과 증오야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할머니 생각은 누가 이기고 지고에 대한 우려보다, 전쟁이 결국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것임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 ‘정의로운 전쟁’ 교리

같은 형국을 당해도 생각은 다르다. 대부분 중간치 정도의 입장일 듯하다. 전쟁은 나쁜 것이기에 안 해야 한다는 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앉아서 당할 수는 없기에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무력을 쓰지 않을 수 없고, 혹시라도 그런 날이 올 것을 대비해서 힘을 키워야 한다. 즉 군비를 증강하고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 침략은 ‘불의’하지만, 정당방위격 무력 사용은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교회는 오랫동안 ‘정의로운 전쟁’을 수용했고 교리로 가르쳤다. 이 개념은 4세기 히포의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언급됐고,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교회의 가르침으로 정립됐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지속적인 피해, 최후의 수단, 성공 가능성, 피해의 비례 등 ‘엄중한 조건들’ 4가지를 충족하면 이는 ‘정당한 전쟁’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지난 4월 11~13일 교황청에서 열린 국제회의 참석자들은 ‘정의로운 전쟁론’을 폐기할 것을 교황에게 요청했다. 국제 평화운동 단체인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와 함께 회의를 공동주최한 것은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교황청 공식 기구가 4세기 이래 처음으로 ‘정의로운 전쟁’ 교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참석자들은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며, 이 교리는 자주 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악용됐기에 교회는 비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정의로운 평화’로 대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교황이 이에 대한 새 회칙을 반포해줄 것을 요청했다.

오늘날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의문시됐다. 대량 살상 무기는 ‘정의로운 전쟁’의 성립 조건을 불가능하게 하며, 비폭력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라는 역사적인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우간다 주교회의 의장이자 굴루대교구장 오다마 대주교는 “모든 전쟁은 파괴적이고 파괴 속에 정의는 없으니, 이는 시대착오적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회의를 공동주최한 ‘그리스도의 평화’ 마리 데니스 공동의장은 불의한 침략은 퇴치돼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군사력에 의존하는 한, 무력 외의 다른 대안을 창출하고 발견할 수 있는 창조적 노력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 ‘비폭력’에 대한 새 회칙 가능성

교황은 4월 12일 참석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인류는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들을 모색해야 한다”며 불의한 침략에 맞서 “비폭력의 가치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의장 피터 턱슨 추기경은 영국 ‘선데이타임즈’와 가진 인터뷰에서 새 회칙 반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주 ‘정의로운 전쟁론’이 전쟁을 방지하기보다는 승인하는데 오용되고, 대안을 마련하는 노력을 저해했다”면서 “단체성(collegiality)을 중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폭넓은 논의를 거쳐 새 회칙을 반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의 안사(ANSA) 통신은 차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시노드)의 주제는 ‘세계 평화’(Global Peace)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보도에 의하면, 4월 18일과 19일 이틀 동안 열린 교황청 주교시노드 사무국 상임위원회에서 교회 일치, 기혼사제의 가능성 등과 함께 ‘세계 평화’가 다음 시노드의 주제로 논의됐다.

이러한 흐름을 볼 때, 다음 시노드 주제가 ‘세계 평화’가 되면 ‘회칙’은 아니더라도, 교황권고의 형식으로 세계 평화와 비폭력에 대한 발전된 가르침이 발표될 가능성도 있다.

■ 분단 현실 속 평화 노력 더욱 절실

‘정의로운 전쟁론’이 교리서에서 배제될 경우, 이는 국제 관계, 특히 국제 분쟁에 대한 교회의 접근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근현대 대부분 교황들은 전쟁과 무력 사용에 대한 절대적 반대의 입장을 표명해왔다. 1·2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정의로운 전쟁’ 역시 엄격하고 까다로운 조건들을 준수하는 방향으로 이끌었고, ‘정의로운 전쟁론’에는 평화주의 정신이 수렴됐다. 냉전이 무너지던 90년대 초 개신교를 중심으로 ‘정의로운 전쟁’ 대신 ‘정의로운 평화’ 개념이 나타나기도 했다.

분단과 군사적 대립이 고착화된 한국에서도 ‘정의로운 전쟁’은 의문에 부쳐지고, 평화는 반드시 비폭력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로 간주된다.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 2012년 11월 12일 제주 중앙주교좌성당 시국미사에서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는 이렇게 말했다.

“정당한 전쟁은 없습니다. 전쟁은 사람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그 빈자리를 폭력과 증오로 가득 채우는 최악의 선택입니다.”

군사적 긴장 상황과 관련해서, 한국교회가 주교회의 및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명의로 발표하는 성명들에서도 전쟁은 결단코 지지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군비 증강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서울대교구 정평위는 2013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과 평화, 그리고 교회’에서 “(군비 증강이)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15항)면서 비폭력으로 폭력을 이길 수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비현실적 이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교회 당국의 공식 입장이 전쟁에 대한 절대적 반대지만, 분단 국가의 현실은 ‘정의로운 전쟁론’의 완전한 배제를 어렵게 한다. 여전히 국가 정책은 군비 증강과 무력 불사의 적대 논리를 향한다. 가톨릭 신자들을 포함한 국민들도 서로 의견을 달리 한다. 전쟁과 무력에 대한 토론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다만 교황청에서 열린, 4세기 이후 처음으로 교황청이 지지하고 후원하는 회의를 통해 ‘정의로운 전쟁론’에 공식적인 이의가 제기되었기에, 이후 교황이 어떻게 이러한 논의를 이끌 것인지는 귀추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가르침에 어떤 변화가 이어지느냐에 따라, 세계 평화를 위한 교회의 노력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박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