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아시아 복음화, 미래교회의 희망] 가톨릭신문‐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공동기획 ⑫ 일본사회와 그리스도교

구정모 신부 (예수회 일본관구·조치대 신학교수)
입력일 2019-11-19 수정일 2019-11-19 발행일 2019-11-24 제 317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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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중심의 종교 문화 체제, 복음화 직면 과제로”
그리스도교 교리, 다신교 신앙관과 맞지 않아 박해받아
과학기술 발달에도 천황제는 일본인 내면에 깊은 영향

일본의 가톨릭 신자수는 인구의 0.5%도 미치지 않는다. 가톨릭교회의 전래 역사에 비해 복음화가 더딘 상황이다. 이번 호에서는 예수회 일본관구 소속으로 조치대 신학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구정모 신부의 기고를 통해 그리스도교가 일본사회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본다.

지난 10월 22일 일본에서는 새 국왕인 나루히토(德仁)의 즉위식이 있었다. 즉위식을 뉴스에서 보신 분들은 기억하겠지만 천황은 일본의 전통 복장을 입고 신전 같은 곳에서 의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이 의식은 일본 고유 종교인 신토(神道)에서 대사제관의 임명식과 관계가 있다. 마치 가톨릭교회에서 새 신부나 새 주교가 서품을 받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왜 국왕의 즉위식에 사제서품식 같은 종교 예식이 혼합되어 있는지 의아해 하시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는 지금까지의 일본과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힌트가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이후 일본 문화가 어떻게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고 수용해 왔는지를 해석하는 열쇠가 일본의 천황제 그리고 그 제도의 종교적 문화적 기반이 되어온 신토와 깊게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천황 중심의 다신교 사회 일본

예수회 선교사들은 1560년 당시 일본의 수도인 교토에 진출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접한 당시의 천황 오오기마치(正親町)는 다이우스하라히라는 이름으로 윤지를 내리고 그리스도교를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 천황은 정치적인 힘이 약했기 때문에 예수회를 추방할 수는 없었고 신부들은 쇼군(將軍) 오다 노부나가의 묵인 하에 교토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천황이 내린 윤지문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현대의 천황제까지 이어지는 일본 종교 사상의 뿌리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에는 아마테라스오오카미(天照大神)를 정점으로 하는 다신교의 신앙체계가 있다. 그 윤지문에는 천황은 최고신인 아마테라스오오카미의 대사제이며 동시에 신인(神人)이라는 이해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체계는 자연히 일본의 그러한 신앙관에서 보면 이설일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일본의 다신교 체계 하에 있는 신들에게는 적이 되는 셈이다.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런데 도요토미가 1587년에 발포한 바테렌 추방령에는 그리스도교 혹은 그 선교사들의 박해나 추방의 본질적 이유는 일본의 근본이 되는 신토적 종교 체계와는 맞지 않는다는 저항감이 깔려있었다.

■ 천황 중심의 선민의식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보다 더 철저하게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 1614년에 발포된 그의 추방령도 도요토미의 추방령과 같이 그리스도교는 일본의 종교 체계와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근본적으로 융화될 수 없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에 바탕을 제공하는 것이 소위 일본식 신국사상이다.

신국사상은 시대에 따라 그 강조점이 변화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이 타민족에 비해 우월하다는 사상으로 연결된다. 마치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같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신앙 시스템과 다른 점은 인간으로서의 천황이 최고신인 아마테라스오오카미의 현현이라는 점과, 이로 인해 파생될 수밖에 없는 타자, 타민족,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우월성이다.

1868년 메이지(明治) 천황과 함께 시작된 메이지 시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국가 체계가 가장 극명히 들어난 시대였다. 이 당시의 일본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 ‘대일본제국 헌법’인데 이 헌법에는 분명하게 천황이 신국인 일본을 통치하는 신인(神人)임이 표명되고 있다. 이 헌법을 기반으로 당시의 일본은 그리스도교 등 외세의 종교를 배타하는 한편,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 무시무시한 전체주의적 시대가 시작된다.

2017년 10월 11일 성 베드로광장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반알현에 참가한 일본교회 신자들.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타종교에 배타적인 천황 중심의 신토문화를 이해하고 이러한 문화에 대면해 대화해야 한다. CNS 자료사진

■ 마지못해 허용한 종교자유

많은 이들이 일본은 메이지 시대와 함께 외래 종교에도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일본이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1946년 11월에 새 헌법이 발포되기 전까지는 외래 종교의 신앙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 한 구체적 예가 무라카미 욘방쿠즈레(浦上四番崩れ) 사건이다.

욘방쿠즈레 사건의 전말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에도 말기에 일본은 서양의 열강들로부터 문호 개방의 압력을 받고 일본의 다섯 개 항구를 외국인들에게 개방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도 속속 일본에 입국하게 됐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나가사키와 요코하마 등에 진출했고, 1865년에는 나가사키의 우라카미에 천주당(천주교회)을 세웠다. 물론 이는 일본인들 위해서가 아니라 외국인들을 위한 성당이었다.

그런데 그 건물을 본 일본 사람들 중에는 그때까지 약 250년간 숨에서 신앙을 간직하여 왔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프치장 신부에게 다가가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했다. 1865년부터 1867년까지, 수천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나타났다. 이에 당황한 메이지 정부는 이들을 체포해서 고문이나 유형(流刑)을 보내는 등 신앙 포기를 강요했는데 많은 이들이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자들 중 약 3300명이 유형을 당하였는데 그 중 양 660명은 유형지에서 순교를 하게 된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탄압 조치에 대해 서방 각국의 대표들이 강력하게 항의했고 결국 메이지 정부는 1873년에 그리스도교 금지를 명하는 고찰(高札)을 철거했다. 이리하여 일본 사람들은 1614년부터 시작된 금령을 벗어나서 그리스도교를 공공연히 믿는 것이 묵인되게 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허용된 것이 아니라 묵인되었다는 것이다. 즉 일본 정부는 신토의 종교 체계와는 근본적으로 조화될 수 없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허용할 수는 없었고 외국 열강의 압력에 못 이겨서 마지못해 묵인했던 것이다.

■ 일본 복음화를 위한 과제

필자가 일본에서 30년 가까이 선교사로 살면서 자주 받는 질문은 “한국에는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발전했는데 일본에서는 왜 그리스도교가 발전하지 않는가”이다. 이 질문은 좀 더 면밀한 분석이나 해석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일본은 신토에 바탕을 둔 종교 시스템이 천황제도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정치 시스템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일본은 과학 기술이 첨단으로 발전한 사회임에 틀림없다. 동시에 일본의 정신세계는 고대나 중세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상이 아직도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일본의 천황제는 상징 천황제로 바뀌었지만 그 형태가 바뀌었을 뿐, 천황제를 주축으로 하는 일본사회의 정신 체제 혹은 그것을 근본에서 지탱하는 종교성은 일본인들의 내면에 아직도 깊게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적 복음화 과제는 천황제를 통해 유지되어 온 일본의 종교 문화 체제와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대면하고 대화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하겠다.

구정모 신부 (예수회 일본관구·조치대 신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