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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70년 전 캐롤 신부가 보내온 편지

성슬기 기자
입력일 2020-06-09 수정일 2020-06-09 발행일 2020-06-14 제 319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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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다시 희망 심기까지
전쟁 이후 6배나 오른 쌀값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피난민들 ‘가톨릭 전쟁 구제회’로 구호
정부와 협력해 구호물자 분배
전국 136개 급식소 운영으로 26만 명에게 1일 한끼씩 공급
개신교 목사들과 힘을 모아 식량과 옷·의약품 전달하기도

1953년 6월 19일 캐롤 몬시뇰이 ‘가톨릭 전쟁 구제회’ 한국 지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메리놀 외방전교회 출판부장 알버트 네빈스 신부가 대구를 방문해 성모당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캐롤 몬시뇰, 최덕홍 주교, 알버트 네빈스 신부.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는 당시 대구대목구장 비서였던 젊은 시절의 김수환 추기경.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고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전쟁 중 국내에서 선교사로 활약한 조지 캐롤 몬시뇰(메리놀 외방전교회)의 관점으로, 당시 활동한 외국 선교사들의 기여가 훗날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짚어 본다.

기사는 캐롤 신부 이야기가 실린 「교회와 역사」(2009년 1월 호~2011년 4월 호) 자료 등을 참고해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 6월 25일 새벽, 비극의 시작

1950년 6월 25일 주일. 오늘 아침에는 비가 몹시 내렸다. 미사 강론을 위해 주한 미 군사 고문단 안에 있는 경당으로 갔다. 미사는 오전 9시15분에 시작하는데, 달랑 8명만 앉아 있었다. 미사를 마치기도 전에 그 이유를 알았다. 새벽에 공산군이 북에서 쳐들어 왔다는 것. 전쟁으로 모든 공무원과 남자들이 동원됐다.

다음날인 26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미사를 봉헌했지만 오후 내내 우리는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오는 대포의 굉음을 들었다. 아무도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다. 대략 공습경보가 10~30초 정도 울리고 바로 뒤이어 비행기가 나타나는데, 단지 기관총 소리만 들려오고 폭탄 투하는 없었다. 문제는 탱크다. 오후 내내 우리는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오는 대포의 굉음을 들었다. 탱크, 지프차를 타고 도시를 관통하는 군대의 이동이 아주 소란스럽다.

7일 새벽 3시30분. 연락장교 중 한 명이 와서 깨우며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했다. 거리마다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공중 폭격은 없었다. 거리에는 공산당 무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물건들을 보따리와 꾸러미로 싸서 이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서울 용산역 바로 가까이에서 몇 대의 폭격기가 우리에게 맹폭격을 가했지만, 다행히 폭격당한 사람은 없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가톨릭 구제회’가 보낸 구호물자를 트럭에서 내리는 모습. 구호물자 부대마다 영어로 수신자는 조지 캐롤 몬시뇰 앞이라고 적혀 있다.

■ 전쟁의 야만성을 고발합니다

1950년 10월 30일. 평양에서 이 편지를 쓴다. 패트릭 헨리 클리어리 신부와 함께 어제 서울을 출발해 평양에 도착했다. 여기는 매우 슬픈 상황이다. 홍용호 주교(제6대 평양교구장)님이 체포됐고 이후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비록 시신이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장차 잡혀 간 분들 모두가 죽임을 당하리라는 생각에 매우 두렵다.

경북 안동에서는 감실 문을 떼어 버리고, 제대 뒷벽에 과녁을 그려놓고는 사격 연습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 모든 제의, 성화, 제구, 십자가상 등을 한 데 모아 태워 버렸으며, 성체를 가져다가 짓밟고 모독했다.

이번 전쟁으로 한국은 성 베네딕도회 소속 사제를 포함해 약 68명의 사제를 잃었으며, 대전에서는 많은 사람이 감옥에서 살해됐다. 많은 전교 회장과 평신도 지도자들도 실종됐다. 개신교도 우리가 당한 것과 비슷한 고통을 겪었다.

1952년 6월 30일. 남쪽에만 거의 500만 명에 이르는 전쟁 피난민이 북적이고 있다. 쌀값이 보통 때보다 6배나 올랐다. 많은 피난민들이 간신히 나무껍질이나 뿌리 또는 먹을 수 없는 것들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

전북 남원에서는 피난민들이 살고 있는 가축우리와도 같은 헛간을 방문한 적도 있다. 무슨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대신에 눈물이 나와 어린아이처럼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 오두막집을 보고 나니 어쩔 수가 없었다.

■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전쟁 이후 한국에 머무르며 굶주리는 이들을 위한 구호물자 배급에 가장 많이 신경을 쓰고 있다. 현재 ‘가톨릭 구제회’ 산하 부서인 ‘가톨릭 전쟁 구제회’ 한국 지부장을 맡고 있는데, 주로 국내에서는 정부와 협력해 구호물자 분배 활동을 지휘하고 미국에서는 적극적으로 홍보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가톨릭 구제회가 한국을 적극 지원한 데는 프랜시스 조지프 스펠만 추기경(당시 뉴욕대교구장)님의 역할이 컸다. 스펠만 추기경님은 전쟁이 일어나자 그리스도교적 형재애로 한국을 돕자고 호소하며 물품 기증 운동을 벌여 막대한 구호물자를 전달했으며, 성탄절 무렵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셨다.

1961년 2월 9일. 한국에서 가난에 찌든 농부·떠도는 피난민·전쟁고아 등을 돌보던 중 한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나에게 아주 큰 영광이다. 하지만 주변에는 그 상을 받아 더욱 마땅한 사람들이 더욱 많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 난다. 현재 가톨릭 구제회 본부에서 발송한 약 3만8000톤(연간 6~7만 달러에 해당)에 이르는 구호 물자를 관리하고 있다. 또 전국적으로는 136개에 이르는 급식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교 신자를 포함해 대략 26만 명의 사람들에게 하루에 한 끼를 공급하고 있다.

1965년 서울에서는 ‘국수 급식소’를 시작했다. 여기에서는 매일 9000명에 이르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식사를 한다. 여기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하루에 25~50센트의 품삯을 벌기 위해 등에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는 짐꾼들이다.

여전히 이곳에는 입을 옷이 꼭 필요하다. 피난 온 사람들 중 일부는 맨땅 위에 얇은 판자와 양철로 얽어 만든 판잣집에서 산다.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은 땅 위에서 그저 지푸라기를 겹겹이 깔거나 갖고 있는 옷을 모조리 껴입으며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 종교를 초월한 이웃 사랑 실천

전쟁 기간 중 우리는 종교를 뛰어넘어 개신교와 적극 협조하기도 했다. 우리는 수많은 피난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감리교 선교사인 브리스 빌링스 박사와 힘을 모아 배급 물품을 여러 피난민 수용소로 옮기고 있다. 주된 배급품은 식량과 옷, 그리고 의약품이다.

개신교 목사들도 참 헌신적으로 피난민들을 도왔다.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밥 피어스 목사는 1950년 9월 프랭크 필립 박사와 함께 ‘월드비전’을 설립했다. 재밌는 점은 그가 전쟁 중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1950년 10월 종군기자로 자진해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는 점이다.

영화 제작자이기도 했던 피어스 목사는 당시 전쟁과 고아들의 영상을 담아 기록영화를 제작해 이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모금운동도 전개했다. 전쟁 후반기에는 한국인 여성과 외국 군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버림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위한 일시 보호소도 세워 지원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할 때 한인 목사 등과 동참한 해럴드 보켈 선교사는 평양과 함흥, 원산, 흥남 등지에서 트럭에 성경을 싣고 주민들과 포로들에게 나눠주며 포로 선교를 했다. 그가 평양에서 선교 활동으로 만난 포로는 3만 명에 이르렀다. 또 평양에서 약 5만 명의 전쟁포로 가운데 6명의 한국인 목사를 찾아내기도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1951년 12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포로 중 304명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견진성사를 거행했는데, 보켈 선교사도 이곳에서 포로들에게 구원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조지 캐롤 몬시뇰: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로, 1931년 2월 1일 사제품을 받은 직후 한국 선교사로 자원해 같은 해 8월 한국에 입국했다. 한평생 한국에서 선교사의 삶을 살아간 캐롤 몬시뇰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특히 어려운 시절에 하느님 사랑으로 한국인들과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며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요리강령」으로 아이들에게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캐롤 몬시뇰.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가톨릭 전쟁 구제회’ 한국 지부장을 맡았던 캐롤 몬시뇰은 국내에서 구호물자 분배 활동을 지휘하고 미국에서는 홍보 활동을 적극 펼쳤다. 출처 「교회와 역사」

1936년 1월 20일자 문서로 “아주 작은 친절이나 자비로운 행동이 선교에 큰 효과가 있음”을 전하는 캐롤 몬시뇰의 경험담이다.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