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83세를 일기로 타계한 한솔 이효상

입력일 2020-08-03 수정일 2020-08-03 발행일 1989-06-25 제 1661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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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 길러낸 신앙의 거목
가톨릭신문전신「천주교회보」창간위원
1962년 그레고리오 기사 대훈장 수상
교육ㆍ정계 두루 거친 깨끗한 성품 소유자로 정평
정계은퇴 후 고향서 저작활동에 몰두
시인ㆍ철학자ㆍ교육자ㆍ정치인으로 한국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한솔(一松) 이효상옹이 6월 18일 선종했다.

가톨릭신문 창간위원이기도 한 한솔은 30여 년간 몸담았던 교육자생활에서 정치가로 입신、4ㆍ19후 10ㆍ26까지 한국의 현대정치사를 몸으로 확인해 온 격동기의 정치주역이라는 점 외에 아들을 대주교로 길러내는 등 평생을 철저한 신앙생활로 살다 간 한국교회 평신도의 거목으로 평가되고 있다.

1927년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회보」를 창간、일제하 신자들의 계몽에 앞장 서 온 한솔은 1920년 계산동본당 가톨릭소년회장직을 비롯 남방천주공교청년회간부、대구대교구 지도급 원로신자 모임인 우륙회 회원、국회신자모임인 다비드회 회장、대구대교구 가톨릭액션협의회 고문、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맡으며 교회발전에 이바지해왔다.

한솔은 1906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고보(현 경북고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동경제국대학교 문학부 독문과를 마친 데 이어 54년 벨기에 루벵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이후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중고교)교장、경상북도 학무국장、경북대 문리대학장 등 30여년의 교육자생활을 거친 뒤 60년 4ㆍ19후 참의원에 당선、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 참의원선거 당시 경상북도 전역 천주교 신자들의 열성적인 선거운동과 선명한 학자풍의 한솔 개인적인 인기로 선거자금을 들이지 않고 백남억씨에 이어 2위로 당선되는 영광을 안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한솔은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격동기라 일컬어지는 제3공화국과 4공화국 유신시대를 살아오면서도 탁월한 대인관계와 학자출신의 깨끗한 이미지、원만하고 온건한 성품으로 국회의장을 4차례 역임、국회의원 5회 당선이라는 기록을 수립했다.

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정계를 은퇴、귀향한 한솔은 30여 년 동안 맡아 오던 경북중고등학교 동창회장직과 대한산악연맹 대구ㆍ경북연맹회장직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난 채 「정치와 종교」「20세기의 문학과 종교」등의 저작활동과 교회활동에 정열을 쏟아 오다 2년여 전부터 지병인 고혈압으로 투병생활을 해왔다.

1962년 교황 바오로6세부터 그레고리오 기사 대훈장을 수상한바 있는 한솔은 80년 귀향 후 81년 5월 15일 대구대교구 설정 70주년 기념 성체대회 준비위원을 역임했으며 81년 6월 6일 교구설정 70주년 기념 교구장 공로상을 받는 한편 83년 3월 21일 이래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일 해왔다.

남긴 저서로는 한솔선집 전6권、한솔 문학집 전5권、시집 전6권(산 바다 사랑 인생 안경 선인장)、정치와 종교 전3권、기타 저서 도합 50여 권이며 번역서로는 떼이야르드 샤르댕(전16권)과 철학총서 전5권 등이다.

한편 노태우 대통령은 6월 19일 오후 고(故)이효상 전국회의장 빈소에 홍성철 비서실장과 이수정 공보수석 비서관을 보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조문했다. <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