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13인의 신부님 / 오은주

오은주(말가리다) 소설가
입력일 2021-10-12 수정일 2021-10-12 발행일 2021-10-17 제 3265호 2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13인의 신부님이라니! 소설이나 영화 제목도 아닌데 13인의 신부님이라니, 이게 어떤 사건과 연관된 숫자인가. 때는 1994년 성탄절 기간, 그 당시 내가 살던 이탈리아의 밀라노는 세계적인 패션의 도시답게 거리마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루미나리에가 반짝이며 그 밑을 걷는 사람들에게 절로 성탄절의 환희와 기쁨을 전해주었다.

바로 그해 우리집에 물경 13인의 신부님이 오신 희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집을 비롯해 밀라노에서 일하는 우리나라 회사 주재원들은 자녀들 방학 기간이라 스키를 타러 북부산간 지방으로 많이 떠나 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생전 처음 타는 스키를 배우느라 끙끙대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로 당장 이름도 멋진 그 몽블랑에서의 스키를 접고 내려왔다.

밀라노 한인성당 주임신부님의 전화였다. 대구대교구에서 파견되신 주임신부님에겐 근처 나라인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공부하고 계신 친구 신부님들이 많았다. 성탄 휴가철이라 기숙사도 다 문을 닫는 시기라 교구사목을 하고 계신 이 신부님께로 모두 오신다는 소식과 25일 저녁에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나눌 집이 필요하다는 부탁이었다.

바로 그 신부님들을 모실 집으로 우리집을 낙점하시고 부탁하신 신부님을 어찌 거역하겠는가! 25일 아침에 바로 밀라노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미 머릿속은 음식 장만 걱정으로 채워졌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계신 신부님들이니 우리나라 음식이 얼마나 먹고 싶을까하는 엄마 같은 생각뿐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일단 냉장고의 김치 재고부터 파악에 들어갔는데, 김치찌개 몇 그릇은 충분할 정도라 잡채와 전 등을 만들 나머지 식재료를 사야 했다. 그런데, 성탄절 휴무 기간이라 모든 슈퍼마켓이 문을 닫은 게 아닌가! 머릿속이 하얘지며 더 알아보니 밀라노 중앙역 역사 내의 슈퍼마켓은 성탄절 기간에도 문을 연다고 해서 폭풍 속도로 장을 봐서 집에 와서 바로 불고기, 잡채, 김치찌개, 부침개 만들기에 미친 듯이 돌입했다. 집에 있는 다리 달린 모든 테이블을 동원해서 식탁을 만들었다. 저녁 5시가 넘자 신부님들이 10분 정도 먼저 오시고, 유학생들이 프랑스와 스위스 등에서 밀라노 중앙역으로 오시는 신부님들을 더 모시고 오자 13인의 신부님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나는 완전히 흥분상태에 빠져서 신부님들의 숫자를 세고 또 세고 있었다. 이런 장면이 평신도의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오랜만에 만난 신부님들은 포도주잔을 나누면서 회포를 풀었고, 성악전공 유학생들은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의 우렁찬 성량으로 노래를 불러 흥겨움이 배가되었다. 나중에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보니 그날 오신 신부님들 중에 엄청 유명(?)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그날은 모두 순수한 모습이어서 더욱 감동으로 남아 있다. 김치 재고가 모두 바닥이 나고, 신부님들이 다들 돌아가신 뒤,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뿔싸 큰일이 벌어졌다.

그 당시 초등학교 1학년생인 딸이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25일 하루 동안 약을 챙겨 먹이지 못한데다 다들 귀엽다며 데리고 놀고 하느라 몸살까지 겹친 상태가 되었다. 너무 열이 오르니까 딸의 귀에서 피가 나왔다. 놀래서 응급실로 향했는데 성탄절 기간이라 시내 특수약국만 문을 연다는 게 아니가. 다시 성탄절 기간에도 문을 여는 시내약국으로 달려, 처방약을 먹고서야 딸애는 잠들 수 있었다. 참으로 요란한 성탄절이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나에겐 나쁜 습관이 하나 지배하고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꺼번에 신부님 13분을 대접했던 사람이야, 나는 ‘빽’이 든든해.” 신앙은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는데 나는 오늘도 이런 핑계를 댄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은주(말가리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