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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4)삶, 체험, 앎

정희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1-12-07 수정일 2021-12-07 발행일 2021-12-12 제 327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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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닮은 삶을 살고 체험하는 것이 앎보다 더 중요하다

영성생활은 내면적 체험 중시
종교생활은 종교적 행위 강조
이를 아우르는 것이 신앙생활
진정한 앎이 삶·체험서 오듯
신앙의 앎, 머리의 앎이기보다
몸과 마음, 삶과 체험의 앎

지난해 1월 20일 가르멜 수도회 마산수도원 수도자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신앙의 앎은 머리의 앎이라기보다 몸과 마음의 앎, 삶과 체험의 앎이다. 상징적 행위의 반복을 통한 몸의 단련이 우리를 변화로 이끈다. 가톨릭 신앙이 성사 전례를 강조하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머리, 마음, 몸

어쭙잖은 학자로 살고 있다.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다. 머리를 많이 사용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머리 중심으로 살다 보니 마음과 몸이 점점 빈약해진다는 사실을 요즘 자주 확인한다. 오랫동안 알량한 지식인으로 살아서,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살아내는 일에 둔감해져 가는 나를 쉽게 발견한다는 의미다. 마음이 없는 공허한 지식인, 삶이 없는 위선적 지식인으로 살아온 것이 아닌지 화들짝 놀랄 때가 많다. 머리로 안다는 것, 마음으로 느낀다는 것, 몸으로 실천한다는 것의 간격과 괴리가 크다는 사실을 거듭 절감한다.

신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명사적으로 사유하기보다 동사적으로 사유하라고 자주 강조했다. 명사, 특히 추상 명사를 중심으로 신학을 하면 아무래도 신학적 작업이 추상적이 될 위험이 많다. 동사적으로 생각하고 문장을 만들어서 사유하면, 신학적 서술이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을 담게 된다.

감정과 정서, 의지와 몸보다 이성과 사유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살아왔다. ‘안다’와 ‘생각한다’, ‘느낀다’와 ‘체험한다’, ‘행한다’와 ‘실천한다’라는 동사들 사이에서 나에게 친숙한 것은 아무래도 ‘안다’와 ‘생각한다’이다. ‘머리로 안다’, ‘머리로 생각한다’를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다는 뜻이다. 물론 머리와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다. 이성과 감정과 의지 역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은 저마다 무게 중심을 두는 영역이 조금 다르다. 이성적 사유가 뛰어난 사람, 정서적 공감을 잘하는 사람, 의지적 실천이 훌륭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앎의 방식도 다양하다. 머리로 아는 사람, 마음으로 아는 사람, 몸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 머리와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체험과 삶으로 먼저 아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더 낫고 좋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머리와 지식으로 아는 것이 가장 꼴찌라는 생각이 든다.

■ 신앙, 종교, 영성

가끔 신자들에게 말한다. 종교생활보다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물론 신앙생활은 종교생활과 영성생활을 포함한다. 신앙, 종교, 영성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우리가 흔히 ‘신앙생활 한다’고 말할 때, 종교생활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좁은 의미에서 종교생활이란, 종교적 가르침과 관습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뜻한다. 즉, 교리적 가르침을 따르고 종교 제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영혼 없는 종교생활’, ‘신앙과 영성이 없는 습관적 종교생활’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서술을 가끔 사용한다. 하지만 건강한 의미의 종교생활은 신앙생활에 필수적이다. 신앙생활은 그 종교가 갖는 성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그 종교가 시행하는 제의에 참여하며, 그 종교가 가르치는 일상의 윤리를 실천하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앙생활이 곧 종교생활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 영성생활이고, 집단적이고 관습적인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종교생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성생활은 마음의 신앙생활이고, 종교생활을 몸의 신앙생활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이 가장 큰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영성생활과 종교생활은 신앙생활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다. 신앙생활은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행동하는 삶이다. 신앙은 생각과 체험과 행동, 그 모두를 포함하는 삶이다. 신앙은 앎과 체험과 행동을 포함하지만, 더 중요한 지점은 살아내는 일이다. 신앙은 삶이다.

■ 하느님 - 앎, 체험, 삶

이번 학기 신학생들과 삼위일체 신관을 공부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학자들의 현란한 사유들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하느님에 관한 앎(지식, 인식), 하느님 체험, 하느님을 닮은 삶은 긴밀히 연결된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은 하느님에 관한 사변적인 앎만을 다루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에 대해 신학적으로 사유하고, 하느님에 관한 교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하느님 체험은 환시와 환청을 통한 특별한 체험인가? 하느님 체험은 내면의 영적 체험인가? 탁월한 신비주의적 영성가들만 하느님 체험을 하는가? 평범한 신앙인들의 하느님 체험은 무엇인가? 하느님에 관한 앎은 신학자들이, 하느님 체험은 신비주의적 영성가들이 전문가인가?

성경과 교리와 신학을 통해 하느님에 관해 알 수 있다. 말씀과 성사를 통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 수 있다. 비록 하느님에 관한 확연한 앎이 부족하더라도, 비록 하느님 체험이 강렬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에 관해 조금씩 알게 되지 않을까?

성경과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온몸으로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다 보면,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게 되고 머리로 하느님을 알게 되지 않을까? 몸에서 마음을 거쳐 머리로 가는 순서가 아닐까? 삶에서 체험으로 그리고 앎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하느님을 잘 체험하지 못한다 해도, 그저 악착같이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느님을 안다, 하느님을 느낀다,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산다. 분명 그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물론 그 셋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닮은 삶을 사는 일이 아닐까?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 안에는 하느님을 아는 것과 느끼는 것과 사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잘 알지 못하고 잘 느끼지 못한다 해도, 그저 충실히 살다 보면 느끼게 되고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삶이 먼저다.

■ 전례는 몸과 마음을 단련시켜 삶의 변화를 겨냥한다

몸과 마음이 머리보다 더 중요하다. 삶과 체험이 앎보다 더 중요하다. 신앙이 교리적 앎, 신학적 앎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진정한 앎은 삶과 체험에서 온다. 물론 관찰과 실험과 논리에 따른 순수한 앎도 있다. 하지만 신앙적 앎은 삶과 체험에서 온다. 신앙의 앎은 머리의 앎이라기보다 몸과 마음의 앎, 삶과 체험의 앎이다.

생각과 느낌도 몸을 통해 온다. 진정성을 강조하는 현대 문화는 생각과 의도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내면의 심리적 기제는 언제나 변덕스럽다. 오히려 상징적 행위의 반복을 통한 몸의 단련이 우리를 변화로 이끈다. 철학자 한병철이 “형식의 우위를 복원하는 리추얼적 전환”(「리추얼의 종말」)을 강조하는 이유다. “리추얼은 체화과정이며 몸-연출이다.”(「리추얼의 종말」) 가톨릭 신앙이 성사 전례를 강조하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앎은 몸을 통해 내면화될(체화될) 때만 삶이 된다.

정희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