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이것 또한 지나가리니 - 시간여행자의 편지 / 이수

이수(가브리엘라) 시인
입력일 2021-12-14 수정일 2021-12-14 발행일 2021-12-19 제 327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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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아침,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리하였듯이, 오직 주님만을 붙잡고 가고자 하는 이는 환난 중에도 열망이 깃든 발길로 사랑에 맛들이는, 희망의 여로를 걷는다. 모든 사물이 생동감으로 반짝이는 봄날. 라일락 꽃잎처럼 날아드는 아이들 웃음이 향긋해서 여행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그는 어제의 정처로 돌아가지 않겠다거나, 또 다른 길의 표지가 되려고 그곳에 모퉁잇돌로 남겠다고 결심한 것인지 모른다. 무릇 시간 속을 부유하는 우리가 과거에서 그토록 멀리 떠나와 있음에도 어느 한 곳에 안착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133일은 평화롭게, 232일은 떠들썩하게 걷고 달렸으나, 주어진 시간 안에서 맘껏 기쁨을 누리지도, 맘껏 나이 들어가지도 못했으니, 서러운 경쾌함을 품지 않은 탓이다.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생명들은 그래서 여름을 반긴다. 폭우 속에서 아우성치는 삘기들을 보라. 수런대는 몸짓으로 쓰러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곤두박질하듯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제 힘으로 온몸의 빗방울을 털어내며 온기를 자아내려 함이다. 자전거 바큇살처럼 핑글핑글 돌며 낙하하는 빗줄기도 제 역동성을 뽐내기는 마찬가지다. 이렇듯, 비와 천둥과 먹구름과 땡볕을 시시각각 연출하여 내 시공간을 혼돈과 기적과 축제의 장으로 변모시키는 여름을 나는 ‘신비의 회복자’라고 부른다.

일상적인 노고가 쌓여갈 무렵, 무상성의 은총마냥 가을이 온다. 풍요와 절제의 표상인 열매들로 더욱 튼실해진 가을숲의 정취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기 마련이다. 고단한 발길을 멈추고, 숲가 낮은 그루터기에 앉아 계곡에서 혼자 노는 산그림자를 불러보자. 저녁숲의 그늘은 여행자의 시간을 더는 통과하지 못하여, 이끼 낀 기억의 발자국은 여정을 재촉하지 못한다. 잠시 여로에서 떨어져 나와 쉬고 있는 길. 풀꽃들이 만발한 그 작은 쉼터는 회심한 여행자가 찾은, ‘하느님의 것인 그리스도’(1코린 3,23) 사랑의 새로운 오래뜰이다.

이제 길손의 여정에 겨울이 오고, 삭풍은 매운 냉기를 퍼뜨릴 것이나, 겨울 햇살이 가끔은 눈발을 그치게 하고, 살얼음진 오후를 녹이기도 하겠지. 감염병으로 오염된 시간 위에 얼마간 연인들의 사랑이 머물고, 옹기종기 여린 온기들이 모여 제야의 추위를 녹이면, 거리에 쌓인 침묵의 눈뭉치도 사라지리라. 그제사 희망의 꽃눈을 품은 사랑이 애덕을 꽃피우지 않겠는가.

하느님을 찾기 전, 우리 희망은 오래 냉각된 꿈이었다. 그것은 환난과 수난을 부르는 냉기를 품고 와 우리 심장에 얼음가시로 박혔다.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의 방식으로 찾아온 평화는 십자나무의 고통을 잠재웠고, 녹아내린 눈물은 달근한 성심 안에 끌어당겨져 생명수가 되고, 서서히 그리스도의 향기로 분출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하늘을 자유로이 흐르며 저토록 순수하고 그윽하게 온갖 표양을 아로새기는 구름을 보며, 내 영혼은 하느님의 섭리에 두려워 떨다가, 사랑의 배아로 숨어 웅크린다. 주 권능의 빛과 보호의 그늘로 모든 미약한 것, 얼룩과 흠집과 생채기 있는 것들을 자애와 호의로써 감싸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찬미를 받으소서!

“불변하신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함이니……”(성녀 대 데레사 기도문 중)

크고자 발돋음하는 이를 ‘온전한 사랑’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구원 노정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수(가브리엘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