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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6)공부하는 신앙

정희완 신부(요한 사도·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2-01-04 수정일 2022-01-04 발행일 2022-01-09 제 3277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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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공부, 모든 일에서 하느님 뜻 찾고 예수님 방식 실천하는 일
노년의 공부가 좋은 이유는 원숙함과 지혜로 나아가기 때문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 되게 하려면 오늘 우리의 삶도 함께 공부해야

2019년 1월 5일 수원교구 사이버성경학교 연수 참가자들이 성경책을 펴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려면 오늘의 삶을 공부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공부의 즐거움

한 해를 마감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꿈꾸기보다는 그저 신앙 안에서 잘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한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조금 즐겁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탄식과 회한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비는 마음이다. 삶은 주어지는 것과 만들어가는 것의 이중주다. 운명으로 주어지는 것들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서 신앙의 방식으로 응대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우리 생의 즐거움들은 주로 감각과 관련이 있다. 보는 눈이 즐겁고, 듣는 귀가 즐겁고, 먹는 입이 즐겁고, 만져지는 느낌이 즐겁고, 좋은 내음이 우리를 평안하게 한다. 오늘날 여행과 식도락에 대한 프로그램이 발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비정한 자본주의 시대에 감각과 욕망의 즐거움들은 돈과 시간을 요청한다. 돈이 없는 사람,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은 잘 즐기지도 못한다. 하지만 진정한 즐거움은 감각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질적 소비에서 발생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를 누릴 줄 아는 향유의 즐거움이다. 비용도 들지 않고 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향유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은 공부와 산책이다. 그저 배우려는 태도와 마음의 여유만 있으면 된다.

공부는 나이 들어도 할 수 있다. 젊은 날의 공부는 성취와 인정과 권력을 향하기 쉽다. 오히려 늙은 날의 공부가 배움 그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더 겨냥할 수 있다. 늙어갈수록 더 공부해야 한다. 잘 늙어가기 위해서, 순수한 앎의 즐거움을 위해서, 겸손하고 온화한 노년을 위해서 공부가 더 절실히 요청된다. 학문으로서의 공부든 삶을 향한 인생 공부든 말이다. 노년의 공부가 좋은 이유는 참 많다. 사실, 지식과 권력의 역학 속에서 학문으로서의 공부는 변질되고 퇴화될 위험이 늘 있다. 권력을 향한 지식인들의 변절과 흑화를 우리는 정치의 장에서 쉽게 목격하지 않는가. 노년의 학문 공부는 학문 그 자체의 목적에 집중하게 할 수 있다. 순수한 앎과 지식의 즐거움을 향유하기가 더 쉽다는 뜻이다. 더욱이 탐구와 호기심으로서의 공부는 우리를 언제나 젊게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상 삶을 향한 인생 공부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해야 한다. 청년과 중년의 인생 공부 역시 사람을 성숙하게 하지만, 노년의 인생 공부는 우리를 원숙함과 지혜로 나아가게 한다. 노년의 공부는 지식 탐구보다 지혜 연마에 무게 중심이 있다.

■ 공부의 방식

모든 공부는 바르게 알기 위해,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판단하고 비판하고 지적질하기 위해, 즉 권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위한 문법 공부조차도 원래의 목적은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작고한 평론가 황현산 선생도 트위터에서 위트있게 말을 날렸다. “잘못된 말을 지적하여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법 공부는 꼰대질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말이나 남의 말이나 말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공부하는 행위는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다. 다양한 책을 읽고, 읽은 것을 매개로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보고, 자신의 생각과 말을 글로 옮겨보는 일이다. 공부의 행위 안에는 타인의 다양한 생각을 읽는 즐거움, 자신의 생각을 벼려가는 즐거움, 자기의 말과 글을 사용하는 작가가 되는 즐거움이 들어 있다. 물론 생각하기와 글쓰기는 자주 고통스러운 노역(勞役)이 되기도 한다. 공부의 행위는 듣고 이야기 나누는 일이기도 하다. 공부는 배우고 경청하는 일이다. 공부는 일방적인 강의를 듣는 일이 아니다. 공부는 책과의 대화를 통해, 타자와 진솔한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공부는 서로의 생각을 말하고 듣고 대화하는 일이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어떻게 공부하는가의 문제만큼 누구와 함께 공부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다. “공부란 곧 동학들 사이의 대화적 긴장과 그 상호모방의 호혜성에 빚지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김영민)

공부의 기쁨과 즐거움은 성취의 결과물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공부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다. 공부하는 과정 그 자체가 기쁨과 즐거움이다. 참다운 공부란 머리와 마음과 몸을 관통하는 공부다. 참 공부는 언제나 삶을 겨냥한다. 물론 순수한 앎의 공부도 있다. 앎 그 자체의 즐거움도 크다. 하지만 진정한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을 움직여서 하는 공부가 마음을 건드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공부의 여정은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실현하는 과정이다. 머리와 마음과 몸으로 하는 공부, 삶으로 하는 공부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하며 겸손하게 만든다.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황현산)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 신앙 공부

신앙도 공부가 필요하다. 신학은 신앙에 관한 학문적 공부다. 신학 행위는 신앙을 탐구하고, 교회를 성찰하며,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이다. 신학은 ‘지혜’이며, ‘합리적 지식’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실천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다. 신학 공부가 소수의 전문가에게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 공부는 신앙인 모두가 할 수 있는 공부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이미 신학을 표현하고 있다.”(필립 클레이튼) 신앙인은 누구나 ‘신학적 에로스’를 갖고 있다. “즉, 인간 실존과 세계의 운명에 관한 궁극적인 질문들과 씨름하도록 하느님께 부름받았다.”(미로슬라브 볼프)

신앙 공부는 성경과 교리에 관한 공부이기도 하다. 오늘의 성경 공부는 성경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공부하는 역사비평적 접근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 저자만큼 성경 독자의 문맥을 중요시한다. 일종의 수용비평적 성경 공부다. 두 이야기(성경 이야기와 오늘의 우리 이야기)가 만나고 합류하는 지점을 공부한다. 성경이 오늘의 우리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삶을 공부해야 한다. 넓은 의미의 인문 성경 공부다. 신앙의 빛으로, 성경에 비추어 세상을 읽는 일 역시 신앙 공부의 한 요소다.

공부하는 신앙, 살아있는 신앙, 삶을 흔들고 변화시키는 신앙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명확하게 설명한다. “우리를 성장하게 해주지 않는 신앙은 그 자체로 성장해야 할 신앙이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질문을 받아야 할 신앙이다. 잠든 우리를 깨우지 않는 신앙은 깨어나야 할 신앙이다. 우리를 뒤흔들지 않는 신앙은 뒤흔들려야 할 신앙이다. 머릿속에만 머물며 미온적인 신앙은 ‘신앙’이라는 개념일 뿐이다.”(2017년 12월 21일 연설)

성모님은 신앙 공부의 모범을 보여준다. 신앙 공부란 질문을 던지고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는 태도로(루카 1,29.34),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섬세한 시선으로(루카 2,19.51), 예수님의 방식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이다.(요한 2,5 참조)

정희완 신부(요한 사도·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