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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29)사회 안에서 신앙의 모습과 역할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2-02-22 수정일 2022-02-22 발행일 2022-02-27 제 3283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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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들이 먼저 바람직한 삶을 사는 모범 보여야 한다
‘올바름’ 말하는 종교인들이
더 나은 삶 실천에 나서야
열린 태도로 모범 보여줄 때
선포와 선언 설득력 얻게 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10월 4일 교황청에서 ‘신앙과 과학: COP26을 향해’를 주제로 열린 종교인 모임 중 조속한 탄소중립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있다. 종교인들은 더 열린 자세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자신이 먼저 실천하며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CNS 자료사진

■ 정치와 종교

선거의 계절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정치와 선거라는 블랙홀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정치인들이 메시아처럼 행동한다. 사람들도 정치와 정치인들에게 일종의 메시아 대망 사상을 투사한다. 자신이 지지하거나 선호하는 사람이 당선되어야 원하는 세상이 온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특정 정치인에게 투사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듯한 인상도 받는다. ‘강자 동일시’와 ‘기득권 선망’의 심리가 선거라는 장에서 어지럽게 춤을 춘다. 왜 선거는 난장판처럼 보이는가? 선거가 축제일 수는 없을까? 선거가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토론하고 판단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선택의 장이 되질 않고 왜 감정과 욕망의 퇴행적 한풀이와 집단적 갈등의 장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선거 주자들이 종교 지도자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한다. 사회의 바람직한 방향 설정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세상을 향한 종교 지도자들의 비전과 지혜를 경청하기 위해서일까? 아닌 것 같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 종교가 갖는 사회적 힘에 대한 인정과 그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의 표를 계산한 정치적 행동에 불과하다. 정치인들이 종교 지도자를 방문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종교가 사회 안에서 상당한 정치적 힘을 가진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현실의 반증이다. 현대의 거대 종교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 안에서 하나의 커다란 힘으로 기능한다. 힘은 언제나 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과연 오늘의 종교는 자신이 가진 사회적 힘을 건강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신앙의 관점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식별하고 그것을 용기 있게 선포하는 일은 중요하다. 가톨릭교회는 사회교리의 이름으로 이를 수행해왔다. “교회가 고유한 사회교리를 발전시키고, 사회교리와 거기에서 나오는 책임과 임무로써 사회와 사회 구조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권리이자 의무이다.”(「간추린 사회교리」, 69항) 하지만 이제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만을 선언한다고 해서 왜곡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치적 올바름마저도 한쪽 편의 이념으로 치부해버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후기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것을 이기심과 욕망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린다. 정당한 비판도, 억울한 사정의 호소도, 그저 모두 한쪽 편의 이기적 주장과 이념으로 매도해버린다. 심리학자 키스 스타노비치의 지적은 서늘한 느낌으로 온다. “우리 사회의 고통은 ‘우리편 편향’ 때문에 발생한다. 바로 자신의 기존 신념·견해·태도에 편향된 방식으로 증거를 평가·생성하고 가설을 검증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탈진실 사회가 아니라 우리편 편향 사회에서 살고 있다.”(「우리편 편향」)

정치적 올바름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사회적, 시대적 의제와 비전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소설가 김훈은 “대선에서 생명과 안전의 의제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화려한 정치적 구호만 난무하고 있다. 가난한 시민과 노동자들은 여전히 힘든 삶을 견뎌내야 하고 생명을 담보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종교가 더 넓고 열린 시선으로 정치의 장을 이성과 합리적 선택과 사회적 조율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또 어떤 역할을 담당했으면 좋겠다.

■ 세상 안의 신앙

탈진실의 시대, 우리편 편향의 사회에서 신앙은 어떤 모습으로 서 있고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 신앙은 사회적 삶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동성애, 낙태, 사형제도 문제 등 사회문화적 영역에서 신앙은 교리의 이름으로 가치관 형성과 제도 변화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신앙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상이다. 사람들은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세속의 논리와 방식으로 살아간다. 정치적 삶과 경제적 삶에 있어서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적 가치와 신념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가? 권력(힘)과 자본(돈)의 문제에 있어서 신앙인들은 신앙의 시선으로 식별하고 행동하는가? 냉정하게 말하면, 신앙은 교회 안의 삶과 사회문화의 영역에서만 작동될 뿐이다. 신앙은 성당 경계를 잘 넘어서지 못한다. 성사와 전례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수행하지만, 세상의 삶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앙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과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는 일이다. 교회의 담장을 넘어서면 사라지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오늘의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과 신앙인들의 모습은 어떻게 서술되고 있을까? 물론 영웅적 신앙인들과 일상의 성인들도 있다. 하지만 혹시 신앙은 오늘의 사회 안에서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작은 방법”인 「별것 아닌 선의」(이소영)나 “공존을 위한” 「최소한의 선의」(문유석)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희덕 시인은 최근 발간한 시집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피, 땀, 눈물. 이 세 가지 체액은 늘 인간을 드나든다. 마음이 기우는 대로, 피와 땀과 눈물이 흐르는 대로 가보면, 통증과 배고픔과 추위를 느끼는 영혼들 곁이었다. 시는 영원히 그런 존재들의 편이다.”(「가능주의자」) ‘시인의 말’은 오늘의 종교와 신앙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신앙이 세상의 모든 자리에서 이성적 성찰의 힘으로, 선의의 힘으로, 고통과 슬픔을 공감하고 연대하는 힘으로 작동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 종교와 신앙의 모습에 대한 반성

종교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종교에 부여된 도덕적 우위의 지위를 통해 말의 올바름만 추구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일상의 구체적 삶의 증거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겸손하게 경청하는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종교인들이 제대로 신앙을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은 그저 종교의 영역에서만 작동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신앙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내적 힘으로 작용하지도 않는다. 신앙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종교 역시 하나의 이익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사회적 삶 안에서 신앙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신앙은 그저 성당과 교회와 절에서만 작동될 뿐이다. 사람들은 실제 삶에서 외적으로는 자본과 권력의 힘을 추구하고, 내적으로는 감정과 욕망을 건드리는 우상과 미신에 더 의존한다. 내적 욕망을 자극하는 우상과 미신에 대한 추종은 자본과 권력의 어두운 면을 더 강화할 뿐이다.

종교인들의 선포와 선언은 언제나 실천 속에서 힘을 얻는다. 먼저 종교인들이 구체적으로 더 나은 삶, 바람직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호소력은 언제나 모범과 열린 태도에서 나온다. 종교인들이 더 열린 자세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자신이 먼저 실천하며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종교인들의 선포와 선언은 더 설득력 있게 될 것이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