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고통의 잔은 누구의 것 / 최영균 시몬 신부

최영균 시몬 신부,제2대리구 호계동본당 주임
입력일 2022-04-06 수정일 2022-04-06 발행일 2022-04-10 제 3289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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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면 머릿속 한 구석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이전 성당에서 알게 된 마리나라는 청년이다. 이 청년은 무려 4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머리도 좋은 친구인데 시험 운이 없는지 계속 낙방을 하고 있어, 매년 시험을 앞둔 4월이 되면 기도 중에 떠오르지만 계속 당혹스러운 결과를 듣곤 한다. 그래도 본당신부였던 나를 만나면 위로가 되는지 시험 앞뒤로 꾸준히 연락을 해오고 있다.

시험을 보기 전 어느 토요일 오후 마리나가 찾아왔다. 커피를 한잔 내려주면서 시험 이야기, 신앙 이야기를 하면서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그런데 마리나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왜 예수님은 쓴 잔을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마시라고 강요하는지 모르겠어요. 부담스럽고 힘들어요.”

분명 마태오 복음의 구절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나는 예수님이 마시라고 강요하시진 않으셨다며 즉석에서 책장에 꽂힌 성경을 펼쳐 보았다. 몇 장 들추니 해당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라고 물으셨다는 것이 정확한 성경의 구절이었다. “마리나야, 그것 봐! 예수님이 너에게 마시라고 하신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원망하지 말고 열심히 해봐”라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다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될거야! 지나고 보면 참 신비롭게도 필요한 과정이었던 거지”라며 신부다운(?) 멘트를 날리며 축복을 해주고 마리나는 돌아갔다.

마리나가 돌아간 후 나는 어머니를 뵈러 본가에 갔다. 며칠 전 어머니는 산책 중 넘어지셔서 팔 골절상을 입으셨다. 어머니가 팔을 다치시니 연로한 아버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밥, 설거지, 청소는 기본인데다, 어머니 머리 감는 것까지 수발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설거지도 좀 도와드리고, 어깨라도 주물러 드리러 집에 자주 들르게 되었다.

판공이 시작되고 이런저런 바쁜 일들이 많은 시기라 부모님 집에 자주 가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도 오른쪽 손목을 못 쓰시니, 손 씻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밥도 혼자 드시기 힘들어하는 어머니 모습에 자주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날도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코다리찜을 사드리고 집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다.

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 고통이 감당이 안 되면 마리나처럼 왜 나에게만 이런 쓴 잔을 주시는지 하느님을 원망하고 푸념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지만, 원래 그 잔은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잔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의 죄업과 고통 속으로 하느님은 흑기사처럼 동참하셨다. 그래서 고통의 잔을 함께 나누자고 권하시는 것은 아닌지. 힘든 눈물의 잔을 주님과 함께 나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그리고 나보다 어려운 우리 형제자매들의 눈물의 잔을 기꺼이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닐까. 마리나를 다음에 만나면 이 말을 꼭 해줘야겠다. 아니, 그보다는 내년 봄엔 모든 것이 잘 되어 나에게 연락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최영균 시몬 신부,제2대리구 호계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