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 - 작은 들꽃 한 송이에도, 성령은 깃들어 계시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입력일 2022-05-17 수정일 2022-05-17 발행일 2022-05-22 제 3295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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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도 15,1-2.22-29 / 제2독서  묵시 21,10-14.22-23 / 복음  요한 14,23ㄴ-29
인간의 일상 속에 항상 함께하며
우리에게 사랑과 평화 주시는 성령
근심 걱정 버리고 모든 것 맡기길

‘성령강림’ (터크스 케이커스 제도(영국령) 프로비덴시알레스에 있는 성모섭리성당 소장). CNS 자료사진

우리네 인생사 그 한가운데 살아 숨 쉬고 계시는 성령

예수님의 유언(遺言)에 따르면, 지금 우리 시대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떠나가신 예수님께서는 근심에 가득 찬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협력자이자 우리들의 보호자, 당신과 일심동체이자 분신(分身), 당신의 대체자이자 우리들의 동반자이신 성령을 선물로 남겨주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삶 구석구석을 파고 드십니다. 때로 구차하고, 때로 옹색한 우리네 인생사, 그 한가운데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때로 자연 안에, 때로 한 인간 존재 안에, 때로 매일 발생하는 사건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고맙게도 너무도 오랜만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껏 수분을 섭취한 초목들의 얼굴이 어제와는 달리 무척이나 행복해 보입니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만난 꽃과 나무들이 활기찬 목소리로 제게 인사를 건넵니다. 천천히 바라보니 성령께서는 자연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셨습니다. 성령의 흔적과 그분의 손길, 성령의 움직임과 역사하심을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측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좀 더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좀 더 마음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육으로만, 세상으로만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영으로, 불변의 진리로 되돌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체험하는 바처럼, 성령은 조금은 알쏭달쏭한 분이십니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를 분, 아니 계시는 듯, 그러나 분명코 계시는 분, 안개 속에 계시는 분, 마치도 구름 같고 바람 같으신 분입니다. 많은 경우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쌩’, ‘쓱’ 하고 신속히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감지하고, 그분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을 온몸으로 느끼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작은 들꽃 한 송이 한 송이 속에 머물러 계십니다. 한 송이 한 송이 안에 하느님 아버지 사랑의 손길이 담겨있으니, 성령께서 그 안에 현존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경우 성령께서는 이웃들의 작은 음성이나 작은 몸짓 그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이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 속에, 이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자극과 예언자적 목소리 속에 성령께서 분명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계십니다. 우리 내면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해 측은지심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성령의 움직임입니다. 우리 안에서 기도하고픈 마음, 다시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고픈 마음, 이웃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마음, 불의 앞에 정의로움이 용솟음친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언젠가 형제들과 함께 큰 축제를 성공리에 마치고 회식을 할 때였습니다. 삼겹살을 원 없이 구워 먹었습니다. 어디 삼겹살만 먹었겠습니까? 기분도 좋겠다, ‘소맥’을 제조해서 셀 수도 없는 잔을 비웠습니다. 거기다 철판 비빔밥까지 비벼서, 몇 공기나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습니다. 우선 배가 너무 불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술기운에 정신도 몽롱하고, 그저 드러누울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기도할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움직임도 뒷전이었습니다. 영적인 생각들도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동적인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분의 인도 아래 살고 싶다면 어느 정도의 결핍이 필요합니다. 춥고 배고픔, 긴장과 자극이 필요합니다.

평화를 주시는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돌아보니 저도 참 쓸데없는 근심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삶에 여유가 없고 팍팍했습니다. 인생이 늘 울적했고, 긴장과 초조의 연속이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흐리다고 걱정,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걱정, 시험 잘 못 볼까봐 걱정, 만남의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 혹시라도 내 꿈이 좌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어떤 날은 걱정이 없어서 걱정…. ‘목숨이 아홉 있다는 고양이조차도 근심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남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근심 걱정의 연속이었던 어느 잔뜩 흐리고 우울한 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나이보다는 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아주 낯선 제 얼굴이 거기 들어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죽기 살기로 대대적인 ‘마음 비우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심호흡에 심호흡을 거듭했습니다. 걷고 또 걸었습니다.

날숨을 내쉴 때마다, 의식적으로 제 안의 근심거리, 걱정거리들을 강제로 밀어냈습니다. 들숨을 들이쉴 때마다 대기 중에 있는 충만한 성령의 기운을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들이마셨습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죽기 살기로 비움 작업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놀라운 기적이 제 내면 안에서 시작되더군요. 끔찍했던 상처들, 미처 치유되지 못했던 아픈 기억들, 수시로 떠올라 삶을 옥죄이던 트라우마로부터 아주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기적과도 같이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는데, 정말이지 쓸데없는 데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괜히 오지도 않을 쓸데없는 일에 대한 근심 걱정이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종이배 하나 띄워 보내듯, 흘려보내도 될 것들이었는데, 그리고 꼭 붙들고, 끌어안고, 괴로워했다는 뒤늦은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들, 동반자이신 성령께 모든 것 내어 맡긴 사람들, 보호자이신 성령께 두 손, 두 발 다 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큰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 가도 얻을 수 없는 잔잔한 내면의 평화요 은은한 기쁨이요 자유입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근심 걱정,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너그러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과 십자가 역시 근본적으로 결핍된 인간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