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5)연대, 시(詩), 성체성사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2-05-17 수정일 2022-05-17 발행일 2022-05-22 제 3295호 1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세상 슬픔과 아픔 공감하지 못하면 참된 그리스도인 될 수 없다
주님 성체로 연결돼 있는 우리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이웃
세상 모든 고통에 연대해야

광주대교구 청소년사목국과 정의평화위원회가 2015년 5월 17일 국립 5·18민주묘지 ‘역사의 문’에서 봉헌한 5·18 희생자 추모미사에 대구대교구 청년들도 함께 참례하고 있다.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연결되는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이며, 세상 모든 아픔·상처와 연대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혐오와 연대의 풍경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하고 악해질 수 있을까? ‘가로세로연구소’가 어느 전직 장관의 딸이 근무하는 곳으로 찾아가 영상을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타인의 고통과 힘듦마저도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자신들의 혐오 감정을 배설하는 통로로 삼고 있다. 추악한 일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에 관한 뉴스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 사회는 소수의 희생을 담보로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다수의 편안함과 공리라는 이름으로 소수를 궁지로 모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소수의 약자들에게 점점 더 무심하고 잔인해져 가는 오늘의 사회가 무섭고 슬프다.

양궁 국가 대표 선수 안산이 전장연에 후원금을 기부했다. ‘국가대표선수’라는 사회적 상징이 지닌 책임의 무게를 질 줄 알았고,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가 갖는 아름다움을 체득한 모습이었다. “비장애인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오기를.” “저는 광주여대 초등특수교육과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의 발언은 또 얼마나 분명하고 통쾌했는지. 늙은 내가 젊은 청춘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참다운 선생은 나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절감한다.

페이스북에서 팔로우하는 한 사회학자의 글을 읽었다. 사회 현상들을 섬세하게 통찰하면서 따뜻한 시선이 담긴 글을 쓰는 학자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일주일 커피 한 잔 값 3000원, 한 달 1만2000원으로 미얀마를 돕는 미얀마연대파주시민모임이 꼭 1년이 되었습니다. …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다른 곳을 돕더라도 고마운 일입니다. 형편이 허락하는 분들은 미얀마 호핀고아원을 계속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 세상은 일상의 사소한 자리에서, 이렇게 보이지 않게 연대하는 사람들 덕분에 그래도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고맙고 미안했다. 기억과 연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제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 기억과 기록의 연대

세상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픔과 상처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철규의 두 번째 시집 「심장보다 높이」를 읽었다. 첫 시집인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에서 신철규 시인은 세월호의 슬픔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쳐 이 세계는 비틀거렸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일반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알 수 없어 포기했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엔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해변은 제단이 되었다/ 바다 가운데 강철로 된 검은 허파가 떠 있었다.”(‘검은 방’)

그 슬픔의 깊이를 두 번째 시집에서 다시 저릿하게 기록한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녹슨 슬픔들이 떠오른다/ 어두운 복도를 겁에 질린 아이가 뛰어간다// … 심장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피를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뛴다/ 중력은 피를 끌어 내리고/ 심장은 중력보다 강한 힘으로 피를 곳곳에 흘려 보낸다// … 우리가 죽을 때 심장과 영혼은 동시에 멈출까/ 뇌는 피를 달라고 아우성칠 테고/ 산소가 부족해진 폐는 조금씩 가라앉고/ 피가 몸을 돌던 중에 심장이 멈추면 더 이상 추진력을 잃은 피는 머뭇거리고/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고/ 할 말을 찾지 못해 바싹 탄 입술처럼/ 그때 내 영혼은 내 몸 어딘가에 멈춰 있을까.”(‘심장보다 높이’)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예민한 시인은 여전히 세상의 상처를 기록하고 있었다. 제주 4·3사건의 유적을 보면서 그는 또 이렇게 기록한다.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폭도가 된다// 서로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누워 있는 해골을 보았다/ 얼굴에서 살이 없어지면/ 모두 저렇게 표정이 사라질까/ 텅 빈 웃음만 남기고// 서로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참아낼 만큼 그들은 사랑했던 걸까.”(‘세화’)

그의 시는 타인의 고통과 슬픔과 상처의 기록이다. 시인은 기억과 기록을 통해 슬픔의 사람들과 연대한다. 기억과 기록은 살아있는 시인을 죽은 희생자들과 연대하게 한다. 이처럼 기억과 기록은 삶과 죽음을 연결한다.

■ 기억과 기념의 연대

어느 주간지에서 한 인류학 연구자가 냉동인간에 관해 성찰하는 글을 읽었다. 그는 의례(ritual)의 매개적 의미와 가톨릭 성체성사의 제의적 의미에 대해 서늘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산 자는 자신의 몸 안에 죽은 자의 몸을 받아들임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의 아픔을 치유하기도 한다. 예컨대 가톨릭 신자들이 매우 중시하는 성체성사를 떠올려볼 수 있다.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의 몸과 피를 ‘내 안에’ 받아 모심으로써 내 영혼이 곧 나으리라는, 그 믿음은 개인의 안녕을 넘어 이웃과 공동체의 아픔에 공감하고 개입하는 원동력이 된다.”(송병기)

교회와 신앙인은 성체성사를 살아간다. 성체성사는 그저 거행하는 종교적 예식이 아니다. 성체성사는 전례 성사이며 동시에 삶의 성사다. 성체성사는 최후의 만찬을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가 받아 모시는 몸은 죽은 몸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성체성사의 연대는 구체적 물질성의 연대이며, 종말론적으로 실현된 성사적 연대다. 성체성사의 연대는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

성체성사는 진정한 연대의 정치학이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인종과 민족과 성별과 빈부와 문화의 차별 없이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이웃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살아가는 신앙인은 당연히 세상 모든 고통과 아픔과 상처와 연대한다.

■ 애도와 연대

기억과 기록을 통한 연대가 문학의 일이라면, 기억과 기념의 연대는 종교의 일이다. 문학이 기억과 기록의 방식으로 슬픔을 애도한다면, 종교는 기억과 기념의 방식으로 슬픔을 위로한다. 때때로 그 애도와 위로는 슬픔을 견뎌내야 하는 슬픔이다. “그 슬픔은 타자를 위로하는 사람도 슬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슬픔이다.”(알폰소 링기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의 공동체」)

세상의 슬픔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과 타인의 상처에 무심한 사람은 (탁월한 시인은 될 수도 있지만) 참된 시인이 될 수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기록의 연대와 제의의 연대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기억하고 기념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