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선크림과 빨간 립스틱 / 안봉환 신부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전주교구 문정본당 주임)
입력일 2022-05-24 수정일 2022-05-24 발행일 2022-05-29 제 3296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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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에 정부는 2020년 10월 13일 마스크 착용 의무화 이후 566일 만에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본당 신자들의 얼굴에 생기가 돋는다. 미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해설자의 목소리가 유독 근엄하게 들린다. 사실 하루 이틀 전까지만 해도 영성체 예식 때가 되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신자들이 마스크를 쓴 채 성체를 모시다가 마스크에 걸려 성체가 쪼개지거나 바닥에 떨어뜨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영성체 예식이 다가왔다. 성체를 모시러 나온 신자들, 특히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린 자매들에게 “그리스도의 몸!” 하고 말할 때 어제와는 사뭇 다른 그들의 입술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동안 립스틱을 바르지 못했던 자매들의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며칠 전 구역장들을 긴급히 소집하였다. 코로나19 상황이 완화되는 시점에서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거나 본당에서 활동하기를 주저하는 신자들에게 어떻게 본당 소식을 전해주고 성당에 다시 나오게 할 수 있을지 해결 방안을 모색하며 그들과 함께 고민하였다. 계속되는 코로나19 상황으로 반 모임뿐만 아니라 신심 단체 및 봉사 단체 활동이 정지 또는 중단 상태다. 한마디로 영양이 신체의 말초신경에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상태이다.

“신부님, 쉬고 있는 신자들에게 본당 소식을 알려주며 성당에 나오라고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구역장을 맡지 않으려고 하는 분들도, 심지어 힘들어서 그만두려는 분들도 계세요.” “신자 집 초인종을 여러 번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어요.”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에도 응답이 없어요.” 구역장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뱉는 고민거리이다. 신자 가정에 일일이 전화하고 개인적으로 방문하는 그들의 열성적인 노력과는 달리 결과가 너무 빈약해서 힘들다고 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열성을 다하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좋은 일(?)은 없을까.

안식일에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셨던 주님이 떠올랐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7-19) 히브리 말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한다. 이에 대한 그리스 말 번역은 ‘크리스토스’(christos)인데,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우리말로는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위해 봉헌된 이들, 특히 왕과 사제들 그리고 가끔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부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36항 참조)

본당 주간 가족회의를 통해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끌어 모았다. 가정의 달인 5월에는 주일마다 가족의 사랑을 달콤하게 느끼도록 전 신자에게 사탕을 네 개씩 나눠주기, 어버이날에는 어르신들 가슴에 꽃 달아드리기, 부부의 날, 특히 금·은경축을 맞이하는 부부에게는 특별 선물(예를 들면 교황님의 가정 축복장이나 마주앙 포도주 한 병)을 하기, 그리고 새 성당 건립을 위해 몹시 수고하는 본당의 신자들, 특히 형제들에게는 선크림을, 자매들에게는 립스틱을 선물하기 등등.

잠시 가족회의 생각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자매가 손을 들고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스도의 몸!” “아멘!”

“신부님, 쉬고 있던 신자들이 성당에 너무 많이 나와 무척 행복해요”라고 기쁘게 외치는 구역반장들의 목소리가 조만간에 들리기를 고대해 본다. “자매님! 입술에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활동하세요.” “형제님, 햇볕에 피부가 타지 않게 선크림을 바르고 일하세요.”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전주교구 문정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