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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6·끝)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6-21 수정일 2022-06-21 발행일 2022-06-26 제 3300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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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

농민들 권익 위한 일에 앞장서다
독재 정권으로부터 추방명령 받기도
당시 납치·고문 당하는 사람들 보면서
교구장직 내려놓으려다 다시 받아들여 
“하느님 이끄시는 대로 살면 자유로워”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가 2003년 7월 1일 안동 가톨릭상지대 대강당에서 열린 사제수품 50주년 금경축 감사미사 중 신자들의 축하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교구장 주교는 교황님의 임명을 받아서 됩니다. 또한 한국은 바티칸과도 외교 관계를 맺고 있거든요. 그런데 당시 유신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정권이 일방적으로 추방명령을 내렸고, 이에 주한 교황대사님께선 당장 외무부 장관을 찾아가서 ‘어떻게 교황님이 임명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추방시키려 하느냐’고 항의하셨습니다.

그해 봄에 안동교구장이 된 지 10년이 되기에, 앞서 저는 교황님께 이제 한국인 주교가 교구장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요청 편지를 교황청에 보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이 납치당하고 고문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제가 교구장직 사표를 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방명령 소식을 들으시고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저를 부르시고 이어서 김수환 추기경님과 주교회의 의장을 맡고 있던 윤공희 대주교님도 로마로 오게 하셨어요. 교황님 집무실에서 교황님과 김 추기경님, 윤 대주교님, 그리고 제가 같이 대화를 했죠. 우리나라가 독재 정권 하에 있는 현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제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다는 뜻, 불의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교황님께서는 잘 이해해주시고 오히려 잘 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두봉 주교가 사표를 내면 안 된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라, 한국 정부가 정말 일방적으로 두봉 주교를 추방하면 나는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겠다’며 공개적으로 지지를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났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긴급조치를 해제해서 잡혀갔던 오원춘씨와 신부님 등 관련자들이 다 풀려나게 됐답니다.

그런 시간들을 뒤로 하고, 신임 교구장으로 박석희(이냐시오) 주교님께서 임명되시고, 저는 행주공소에서 꽤 오래 지내다 다시 의성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감사의 기도 말고는 할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가장 편안한 시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미사를 드립니다. 또 성무일도를 바치고 한 시간 이상 개인묵상에 들어가죠. 그저 침묵하는 시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알아서 다 주시는 분께 무엇인가를 더 달라고 할 것도 없고요. 찬양 또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걸로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느님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게 떳떳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녁에는 묵주기도도 봉헌하고…. 기도가 더 길어질 때도 있고, 손님이 오시거나 강연 혹은 피정지도 등이 있으면 더 짧아지기도 하죠.

저에게 버릇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어떤 사람이든 그 안에서 좋은 것만 보려고 노력한다는 건데요. 안 좋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다고 기도하고요. 예를 들어 감기에 걸린 것은 안 걸린 것보다 안 좋은 일이지만, 좀 아파보고 그러면 다른 아픈 사람들의 입장과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고통을 주실 때 아프지만, 그 고통이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시는 게 아닐까요? 아담의 죄가 없었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 죄를 지었기에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고 느낄 수 있었지요.

좋은 것이나 잘 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원치 않은 일을 두고도 감사기도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에 대해서든 안 좋은 일에 대해서든 우선 고맙습니다 하고 기도를 바치면 굉장히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끌어주시는 대로 받아들이다보면 좋은 방향으로 이뤄집니다. 하느님 뜻을 받들려면 지금 받들어야죠.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 그런 게 아닐까요.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보는데요, 특별한 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많은 경우 성령의 말씀을 그냥 스쳐 보내지 않았는지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기분대로만 행동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에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대로 산다면 정말 자유롭습니다. 축복이죠.

사제는 ‘오늘을 사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요. 저는 지나간 것에 대해서도 앞날에 대해서도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바로 지금이거든요. 과거를 돌아보고 자꾸 후회해도 미래를 생각하며 자꾸 불안해한다 해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 내어맡기고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을 열심히 살아야죠. 고맙다고 하면서요. 하느님 앞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고 그것으로 너무나 만족합니다.

교구장으로 있을 때 우리 신부님들께 자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면 언제든 열린 마음으로 들어라. 신자들의 만남과 대화를 거절하지 말라’고요. 여러분, 오늘도 ‘두봉 천주교회’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