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4)
신학생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안전하게 살아왔는가
인생에서 경험한 첫 사회생활, 군복무
상황은 열악했지만 회심의 기회로 남아
독일 도착하자마자 어학·교과 동시 시작
한국서 아쉽던 성서신학 등 신나게 공부
전쟁 후 모두들 참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사제양성은 로마 교황청 후원과 해외 각국 교회 장학금 등의 지원을 받아 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신학교에서 넉넉한 건 사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신학생들도 닭과 돼지 등을 키워 자급자족하려 애쓰고 교우들은 성미운동 등을 해서 학생들의 먹을거리를 보태줬지만 늘 부족했죠. 해외유학은 사제양성에서 중요한 한 과정이기도 했지만, 사실 당장 먹을 입을 줄인다는 면에서도 절실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유학을 가기 위해선 군복무를 하고, 해당 국가 언어와 국사가 포함된 국가고시를 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군대생활이 제 인생에선 처음 하는 사회생활로서 의미가 컸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신학생으로만 살았는데, 모라토리움(일종의 현장 실습) 조차 없던 시기였거든요. 그땐 교구 소속 사제를 ‘재속사제’라고 했는데요, 저는 사회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수도사제’가 돼야 하는 건 아닌지 갈등하기도 했답니다.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갔지만, 내무반 생활수준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무엇보다 폭력을 일삼고 갖가지 생활고를 겪던 이들이 한데 모인 곳이라 하루하루 생활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제일 ‘쫄병’이 신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괴롭힘을 받기도 했고요. 하지만 바로 그 시간이 제 인생에선 깊은 회심의 기회였다고나 할까요.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하는 시간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몇몇 선임병들을 보면서 내심 ‘난 그들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어. 저들과는 다른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의 벽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이란 범죄의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이라는 말이 있죠. 척박한 군대생활 중에도 ‘평생 처음으로 하루 세끼 걱정을 하지 않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신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안전하게 또 혜택을 받으며 살아왔는가’ 돌아보게 됐습니다. 게다가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이웃으로 받아준 사람은 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선 가장 불우하게 살았던 이들이었습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