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연중 제18주일 -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입력일 2022-07-26 수정일 2022-07-26 발행일 2022-07-31 제 3305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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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코헬 1,2; 2,21-23 / 제2독서  콜로 3,1-5.9-11 / 복음  루카 12,13-21
무한히 재물 탐하는 세상의 욕망
결국 허무함과 공허함만 남을 뿐
하느님 말씀 따르는 길 선택하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작자 미상).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복음에 나오는 부유한 사람은 유례없는 풍년으로 곡식창고를 더 늘리고 부를 축적합니다. 그의 관심사는 ‘이제 남은 여생 골프나 치고, 낚시나 하면서 편하게 보내야겠다’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누구 차지가 될까요? 어쩌면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한쪽에서 가족들이 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빈손이 돼 땅 속에 묻히게 됩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가게 되는데요. 우리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언젠가 빈손으로 떠나게 될 텐데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움켜쥐고 욕심을 내고 분주하게 살다 보면, 죽음 이후의 ‘영원’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일은 미루고 또 미루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신학교 다닐 때 없는 게 조금 있었습니다. 악기를 배웠는데 악기가 없어서 학교에서 대여해 주는 악기를 2~3명이 함께 썼었습니다. 같이 쓰다 보니 연습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연습할 수 없고 악기를 찾으러 다니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악기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또 컴퓨터가 없어서 리포트나 논문을 써야 할 때 다른 건물에 있는 컴퓨터방까지 가서 숙제를 해야 했는데요.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느껴질 때마다 ‘타자를 칠 수 있는 컴퓨터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 디지털 카메라를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는 ‘나도 사진기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부가 돼서 월급을 받다 보니 예전에 ‘하나 있었으면’ 하는 것들이 다 있습니다. 악기도 하나 있고, 카메라도 하나 있고, 컴퓨터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 갖춘 지금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하나 있었으면’이 아니라, ‘더 좋은 게 있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악기도 더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고, 사진을 찍다 보면 ‘더 좋은 렌즈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 컴퓨터도 ‘더 빠르고 조용했으면’ 하는 욕심들이 자꾸 생깁니다.

이렇게 더 가지고 싶고 더 좋은 것을 바라는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은데요. 가지고 싶은 욕심뿐만 아니라, 위를 향한 욕구도 계속됩니다.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된다는 느낌이 들거나 신자분들에게 서운함을 느낄 때,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됩니다. 신학생일 때는 ‘신부가 되면 사람들이 내 결정을 존중해 주고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라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었습니다. 또 보좌일 때는 ‘주임이 되면 내 결정을 존중해 주고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하는 마음들이 생길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욕심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미끼를 던집니다. ‘더 가지면 편안할 거야. 더 높아지면 사람들이 너를 무시하지 않을 거야’라는 말로 저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목소리는 다릅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하느님은 “욕심에 따라 사는 삶은 부질없다. 다 차지하고 높아진다고 해도 결국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남을 것이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라. 그것이 영원히 남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형제이고, 친척이고, 같은 왕이고, 같은 제자였지만 구체적인 선택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아벨과 카인은 둘 다 아담의 아들이었지만, 아벨은 하느님을 택하고, 카인은 살인을 택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롯은 둘 다 가나안의 순례자였는데, 그들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선택하지만, 롯은 소돔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다윗과 사울 왕. 그들 모두 왕이었지만, 다윗은 하느님을 선택하고 사울은 권력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유다, 둘 다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배반한 이후에 베드로는 주님의 자비를 구하고, 유다는 죽음을 선택합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는데요. 그 부분을 예수님께서 더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마태오복음에 보면 다음의 선택들이 주어집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넓은 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을 수도 있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길 수도 있고, 재물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양에 속할 수도 있고, 염소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마태오복음 25장 4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하느님을 거부한 사람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선택과 결과가 누구에게 달려 있다는 겁니까?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거죠. 그동안의 삶은 불공평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불평을 잠재울 수 있는 선물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영원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