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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6)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8-10 수정일 2022-08-10 발행일 2022-08-14 제 3306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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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향한 청년들 열정은 기쁨과 활력의 원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신학교 개방
신학·철학 배우려는 신자들 모습에 감동
신학교 업무 외에 개인 시간 등을 쪼개
성경모임 학생들과 함께하며 힘껏 지원 

1980년대 초 ‘가톨릭성서모임’ 출신들과 함께한 모습. 광주대교구 제공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는데요, 그중 하나는 신학과 철학 등을 신자들도 접할 수 있도록 신학교도 개방을 하라는 권고였습니다. 그래서 1972년 봄부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도 신부 지망생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을 위해서 청강제도와 함께 정규과정도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더욱 빨리 확산하고 적용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때는 신자들의 열성도 대단했습니다. 당시 평신도들의 대부라 손꼽히던 현석호·양한모·하승백·김태봉 회장님 등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교회학문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사도직 활동에 힘쓰셨습니다.

일반 신자들의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선교 열의가 대단하여 예비신자들을 적극 인도해 본당마다 신자들로 가득했습니다. 평신도사도직협의회를 중심으로 평생교육 차원에서 다양한 강의를 주최했고요. 어떤 때는 천진암/주어사 강학과 같은 모습 또한 보여 제가 감동하기도 했는데요. 신자들이 서울 남대문시장 안에 있는 방 하나를 임대해서 매주 목요일마다 세미나를 여는 겁니다. 저는 신자들의 요청으로 그 세미나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등에 관한 강의를 했고요. 그들의 열성에 신학교 교수 업무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더라고요.

이 시대 성경모임에 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저에게 성경은 ‘말씀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고, 말씀의 힘입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 예수님을 만나는 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따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 신자들은 성경공부와 나눔에도 정말 열심이었는데요. 저 또한 성서학자도 아니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성경모임을 지원하는데 힘껏 나섰습니다. 당시 한국교회에는 성경전서가 없었던 상황인데도 많은 이들이 성경공부에 열성적이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천주교와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성경이 나온 것도 1977년이거든요. 당시 젊은이들은 선종완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모세오경, 그것도 절판된 책을 구해 복사해서 모임 때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1975년경 ‘가톨릭성서모임’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광주대교구 제공

저는 1971년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몇몇 보좌신부님들과 함께 다가오는 주일의 복음 묵상 모임을 했습니다. 그러다 대학생들을 위해서도 지원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했었는데요, 그때 교구 대학생 지도는 오태순 신부님과 조마오로 수녀님께서 맡고 계셨고, 서로 의기투합이 됐습니다.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대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은 금지됐었거든요. 가톨릭 학생회 활동도 제재를 받았죠. 하지만 성경공부는 일반 동아리 모임이 아니었기에 정부도 금지할 수 없었습니다. 유신정권 시절, 젊은이들의 성경모임은 오히려 훈풍을 맞은 존재 같았고, 삶의 힘이 됐습니다. 1972년 7월 한여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임은 ‘가톨릭성서모임’으로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이 모임은 참가자 누구나 성경을 중심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인원을 5~8명으로 제한했습니다. 모임의 중심은 성경이고, 인도자는 성령이며, 말씀의 봉사자는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도우미일 뿐이라는 원칙도 강조했고요. 먼저 성경 본문을 읽고 새기고, 이어 그 말씀에 비추어 생활을 성찰하고, 말씀을 생활 깊숙이 적용해 증인이 되어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한 과정을 마무리하는 4박5일간의 연수 때에는 신학교 교수 신부님들이 통합강의를 지원했고, 수료생들은 ‘말씀의 봉사자’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성경모임 참가 대학생들은 과외를 하면 그 돈을 자신만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1/3씩을 떼어 모아 가난한 이들을 돕기도 했는데요. 얼마나 기특합니까. 신학교 교수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제 개인 시간 등을 쪼개고 쪼개 성경모임에 함께한 것, 힘들었다기보다는 기쁨이고 활력의 원천이 됐던 것 같습니다. 가끔 신학생들이 ‘왜 우리들을 두고 다른 대학생들을 돌보러 가시느냐’고 투정의 소문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요…. 제 소임에는 소홀함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는 큰 은총의 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등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복음정신에 따라 대사회적인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죠. 한국교회의 존재가 더욱 크게 드러났던 계기가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과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선교 200주년 기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또한 103위 순교자 시성이라는 영광의 열매를 선물 받았죠. 특히 교회가 외적 성장과 활동만이 아니라 내실을 기하기 위해 힘쓴 자리가 바로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였습니다. ‘받던 교회가 주는 교회로’라는 기치 아래 나눔 운동으로 한국교회는 더욱더 사회 안으로 들어가는 성숙한 교회로 발돋움하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 성체성사의 정신을 살고 나누는 교회로서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까지 열었습니다. 그 결과물로 ‘한마음한몸운동본부’ 탄생을 봤습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