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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8)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8-23 수정일 2022-08-23 발행일 2022-08-28 제 3308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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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며 사제로 주교로 살아왔죠

갑작스러웠던 광주대교구 부주교 임명
1년여간 91개 본당 모두 일일이 방문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실천하며 사목

2005년 5월 8일 소록도본당 견진성사 중 최창무 대주교가 견진자들에게 도유하고 있다.

교회는 여러 지체들이 함께 협력하고 성체의 신비 안에서 하나로 녹아드는 신비체입니다. 저의 몫은 서울대교구 사회사목 주교대리, 이른바 ‘서울본당 보좌’라고 할까요. 내적으로는 신자들의 평생교육 차원에서 민족화해학교, 사회교리학교 등을 설립해 다양하게 현장사목을 지원하고 외적으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대변하고 함께 뛰는 데에 여념이 없는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습니다. 꼭 5년간이었습니다.

갑자기 광주대교구 부주교 임명을 받았습니다. 정든 친정을 떠나 시집가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죠. 부주교는 교구장 승계권을 가진 주교이기에 부담도 컸습니다. 하지만 저의 일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을 위해, 한 가족이고 한 지체인 교회 안에서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순명하며 자리를 옮겼습니다. 광주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소록도를 먼저 방문했고 이어 1년여간 91개 본당을 다 돌아봤지요. 미리 알리면 본당 측에서 뭔가 준비를 해야 하니까, 시간이 될 때마다 그냥 예고 없이 찾아보곤 했습니다.

2000년 대희년 광주대교구장 착좌 전부터 광주대교구가 어떤 모습이 되길 바라고 이끌 것인지 등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교회’가 어떻게 되길 구상한다? 저의 소명은 어떻게 이끌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 입니다.

착좌 인사말 중에 저는 ‘나는 신학교 교수를 오래 했으니 제 장점은 공의회 정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잘 따를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광주대교구는 사제 수가 좀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사제 양성에 더욱 관심을 갖자고도 권고했고요. 일선 본당 신부님들께서 각각 본당 사목에 집중하고 계시니, 교구 차원에선 사회사목 분야에 더욱 힘을 기울이자는 뜻 또한 피력했습니다.

2001년 세계 주교시노드 제10차 정기총회에 참석한 최창무 대주교가 프랑스 생드니교구장 오영진 주교(Olivier de Berranger)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실제 교구장 착좌 후 3년간 교구 전체가 내적 쇄신과 교회에 관한 더욱 깊은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전례현장과 교회헌장, 사목헌장을 차례대로 공부했고요. 교구민들이 성경 필사에 맛들이고 각 본당마다 성경통독 프로그램을 실시하도록 도왔습니다. 청년성서모임도 도입했습니다.

사회사목에 집중하는 노력으로는 사회복지재단을 만들어 사회적 변화에 발맞춰 관련 기관들을 보다 능률적으로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대학병원들과 사회 일반병원의 원목 활동을 적극 지원하며 병원사목의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의 하나로 협력 사목, 예를 들어 지구별 협동사목 체계를 갖추고 다져주고 싶었는데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본당 및 지역 간 유대를 강화하는데 협력 사목은 큰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교구장 재임 시절을 돌아보면, 특별히 기뻤던 한 가지는 바로 공소사목 활성화였습니다. 광주대교구 내 공소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온 교우촌이 공소로 자리 잡은 형태가 아니라, 선교사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착좌 당시 공소가 110여 개 있었거든요. 신부들이 이 공소를 순회하며 사목할 수 있도록, 각 공소들이 독립적인 신앙공동체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뜻에서 지원한 것이지요.

2004년 5월 31일 우수영본당 예락공소 100주년 감사미사를 주례한 최창무 대주교가 강론을 하고 있다.

광주대교구장 재임 중에 5·18 민주화운동 25주년도 맞이했습니다. 이날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 교회로서는 파스카의 신비로 성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기념행사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이들이 그 잘못을 인식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도록 교회가 다리가 돼야 했죠. 더불어 25주년 기념미사 때에는 군악대와 신학생들이 함께 합창하고, 모든 참례자 등에게 주먹밥도 나눠주며 민주화운동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가져 뜻깊었습니다.

또한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릇된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고 화해하는 계기를 갖는 노력의 하나로 저는 기념미사를 제정하고 광주 남동성당을 5·18기념성당으로 지정했습니다. 이 기념미사는 지금도 해마다 봉헌되고 있습니다.

아쉬웠던 일의 한 가지는 여러 복합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교회가 해야 하는 의료봉사의 한 구심점이었던 목포가톨릭병원을 폐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터에는 현재 가톨릭목포성지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 준대성전 등이 서 있습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 사제로, 주교로 살아온 저의 모든 시간은 근본적으로 부르심에 ‘네’하고 응답하는 삶이었습니다. 저의 몫은 교회 일을 맡아서 하는 것, 주어지는 것에 응답하는 그것 하나였습니다. 사실 늘 버거울 뿐이었지만 또한 항상 하느님의 은총이 넘쳤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주교나 사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 모두를 부르시고 각자의 사명을 부여해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