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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42)생명과 진화의 시간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2-08-30 수정일 2022-08-30 발행일 2022-09-04 제 3309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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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발전은 신앙 내용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할까
인간도 자연 속 생명체이지만
의식 있는 마음은 고유한 속성
동물과 달리 자기 의식적이라
몸으로 주변 세상과 관계 지각

산 정상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 인간도 자연 속의 생명이지만, 의식 있는 마음을 지닌 인간은 모든 생명체들 가운데 가장 고유한 위치에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커먼스

■ 자연과학의 설명들

신학교에서 창조종말론을 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존 호트, 성공회의 존 폴킹혼, 프로테스탄트의 낸시 머피 같은 학자들의 책을 읽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와 공명을 주장하며, 신학적 설명 안에 과학적 서술과 설명방식을 도입하려는 학자들이다. 신학과 과학의 화해를 추구하는 그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전형적인 문과생인 나에게는 그들의 신학적 서술들이 이해하기 어려웠고,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자연에 관한 이론과 실험을 토대로 하는 자연과학의 서술 방식과 인간과 삶에 관한 이론과 경험에 근거한 인문적 서술은 그 색깔이 다르다. 오늘날 인간 역시 자연 속의 일부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자연의 현상을 탐구하고 설명하는 것과 인간의 무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서로 차이가 있다. 나는 융합과 통섭을 주장하는 학자들보다는 두 개의 언어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더 공감이 간다. 과학과 신학이 서로 대화하고 교류할 수 있고 또 해야 하지만, 과학의 언어와 신학(인문)의 언어는 서로 다른 목표와 지향점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물론 두 언어 이론에 더 끌리는 것은 그저 내 입장과 관점일 뿐이다.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있어서 저마다 선호하는 이론은 다를 것이다.

신학적 관점에서는 때때로 자연과학자들의 입장과 관점이 수용하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그들의 정직한 서술들은 꽤 매력적이다.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책들은 다른 어떤 인문 서적보다 더 철학적이었다. 심리학자이며 신경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 컴퓨터 공학자이며 신경과학자인 제프 호킨스,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 뇌과학자 아닐 세스의 책은 어떤 문학책보다 이야기 전개가 더 흥미롭고, 어떤 철학책보다 더 정직하고 심오한 사유를 담고 있고, 어떤 신학책보다 더 인간과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자연과학자들의 설명이 문학적 정서와 철학적 성찰과 신학적 질문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고, 더 설득력이 있다는 아이러니를 요즘 자주 경험한다.

■ 시간과 진화 속의 생명

우주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듯이, 생명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역시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우주의 시간이 생명의 시간보다 더 길고 먼저 시작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지구에서 생명체의 시작은 40억 년 전으로 추정된다. 호모 사피엔스의 시작은 대략 30만 년 전이라고 한다. 생명의 역사는 존재, 느낌, 앎이라는 연속적인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살아있는 존재에서 느끼고 감각하는 존재로, 배우고 아는 존재로 변해간다. 거칠게 말하면, 단순한 생명에서 느낌과 감정, 마음과 정신과 의식, 지능과 앎, 문화와 역사의 순서로 진화된 것 같다.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가? 의식은 무엇인가? 마음은 무엇인가? 느끼는 마음, 의식하는 마음은 또 무엇인가? 물리주의(physicalism) 입장에 선 과학자들은 느낌과 의식의 기원과 구성을 몸에서 찾는다. 몸 가운데서 특히 뇌와 신경계에 관한 연구를 통해 그 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뇌과학과 신경과학은 오늘날 인간 이해의 첨단에 있다.

인간도 자연 속의 생명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예외적인 생명체인가? 인간과 인간 아닌 생명체 간의 차이를 과장할 필요는 없지만 분명한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인정한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느낌과 의식과 문화적 마음이 인간을 모든 생명체들 가운데 가장 고유한 위치에 자리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의식 있는 마음, 문화적 마음은 기억, 언어, 상상, 추론 등을 통해 인간을 다른 생명체보다 더 창의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느낌과 감정에만 솔직한 동물들과 지능과 앎의 영역에만 특화되어 있는 인공기계(지능)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 일인칭의 삶

의식은 동물도 갖고 있지만, 인간만이 자기 의식적이라고 한다. 나는 ‘나’로 살아간다. 나는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다. 나(I), 자기(self), 자아(ego)란 무엇일까? 아닐 세스는 ‘내가 된다는 것’은 결국 몸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지각과 인지의 총체성, 즉 인간의 경험과 정신적 삶이라는 전반적인 파노라마는 깊이 내재한 생존이라는 생물학적 동력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주변 세상과 그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살아있는 몸으로, 몸을 통해, 몸 때문에 지각한다.” 그렇다면 몸의 삶이 끝나면 의식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지는 것일까? 정신과 의식이라는 우리 내면의 우주 역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몸의 소멸과 더불어 자기라는 의식도 ‘나’라는 것도 사라진다고 물리주의자들은 생각한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만 ‘나’인 것인가?

인간의 느낌과 의식과 앎이 몸(육체, 물질)에 기반한 것이라면 죽음 이후에는 ‘나’라는 느낌, 의식, 앎은 사라지는가? 느낌, 의식, 앎은 사라지지만 ‘나’라는 개체는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는가? 교회는 영혼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난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영혼은 인간 존재의 원리이며 토대다. “교회는 각 사람의 영혼이 – 부모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고, 불멸한다고 가르친다. 죽음으로 육체와 분리되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으며 부활 때 육체와 다시 결합될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366항) 삶의 자리에서 육체와 영혼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합을 통한 단일성으로 존재한다. 지상의 몸과 부활한 몸은 다르다.

사실, 교리적 명제는 설명적이라기보다는 선언적 진술인 경우가 많다. 교리를 고백하고 수용하는 것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 사이에 가끔 괴리가 발생한다. 이 비물질적 영혼의 존재는 과학적 증명의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다. 그런데 정말, 과학과 신학의 공명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오늘날 과학의 발전은 신앙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신앙의 내용을 과거보다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일까?

■ 실존의 시간

지상의 육체에 새겨진 시간은 언제나 소멸을 향한다. 인류의 시간은, 지구의 시간은, 우주의 시간은 더 오래 지속되겠지만, 언젠가 내 실존의 시간이 끝난다는 예감이 자주 나를 슬프게 한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허수경), 내 영혼이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것을 믿고 희망한다.

“역사적·진화적 관점에서 볼 때 의식은 일종의 금단의 열매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단 그 열매를 먹게 되면 고통과 괴로움을 알게 되고, 결국 죽음과 비극적으로 대면하게 되기 때문이다.”(안토니오 다마지오) 의식의 비극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은총이며 눈부신 아름다움이 아닐까.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