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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5)1859년 10월 11일 안곡에서 보낸 열일곱 번째 서한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9-05 수정일 2022-09-06 발행일 2022-09-11 제 3310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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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함 능가하는 사목 생활의 보람된 순간 담겨
교황청에 보낸 순교자 관련 문헌 통해
1857년 조선 순교자 82명 가경자로 선포
신자들이 손수 보여준 겸손과 친절로 
천주교 핍박하던 비신자들 입교하기도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79위 순교자 시복식을 표현한 성화. 현재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 소장돼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최양업이 사목하던 1850년대, 가혹한 박해는 잦아들었다고 하지만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적개심은 여전히 존재했다. 천주교 신자라는 게 밝혀지면 능욕과 폭행을 당하는 일은 예사였다.

최양업도 신자들을 만나러 가는 여정 중 폭행을 당해 추위 속에 옷이 반쯤 발가벗겨진채 읍 밖으로 추방됐다고 서한을 통해 밝힌다. 하지만 “비참함을 능가하는 커다란 위안이 있다”는 이야기도 꺼내놓는다.

“우리에게 비록 배신자도 많고 원수도 많지만 좋은 친구도 많고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한 신자도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신 축복을 만난 순간들이 그의 열일곱 번째 서한에 담겨있다.

■ 조선 순교자 82명, 가경자로 선포되다

1857년 당시 최양업에게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 조선의 순교자들이 가경자로 선포된 것이다.

“슬픔 중에도 신부님으로부터 무척이나 기쁜 소식을 받고 더할 수 없이 큰 위로를 느꼈습니다. 조선의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교황 성하의 인정을 받고 우리 자모이신 교회의 전면에서 온 세계에 가경자로 선포된 소식 말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순교자들도 성인 반열에 오르시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공경을 받으신다면 얼마나 기쁘고 영광되겠습니까?”

당시 조선교회는 교황청에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란 문헌을 보냈고, 시복 조사가 시작됐다. 1847년에 이 문헌을 접수한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부)은 박해로 인해 조선교회가 교구적 차원의 시복 조사를 할 수 없으나 이 문헌 자체로 교회법에서 요구되는 교구 조사를 대치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1857년 9월 23일 조선교회의 시복 조사를 공식으로 접수하는 법령을 반포, 82명의 가경자가 탄생했다. 이 중 79명은 1925년에 시복됐고, 1984년에 79명 모두가 시성됐다.

최양업이 가경자 탄생을 기뻐한 지 127년만의 일이다.

■ 곳곳에서 발견한 사목 생활의 보람

최양업은 사목 순회를 하며 반 무장을 하고 다녀야 했다고 전한다. 신자들 사이에 형제처럼 착하게 어울려 다니던 사람들이 악인들로 변해 약탈과 박해를 일삼기 때문이다. 천주교 신자라는 게 밝혀져 두들겨 맞고 신발과 갓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최양업은 미사 짐에 손을 대려는 포졸에게 “여기는 절대로 너희 마음대로 짐에 손을 댈 수 없다”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이처럼 노고와 고난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목 생활의 보람을 찾는 순간도 종종 찾아왔다. 은총에 충실한 신자들을 만나고 반대자들이 하느님의 편에 들어왔을 때다. 최양업은 열일곱 번째 서한에서 사목 생활의 보람이 됐던 순간을 소개한다.

열두 가구가 살고 있는 한 마을을 알게 된 최양업. 이 마을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으나 어느새 아홉 가구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하지만 입교하지 않은 세 가족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박해를 일삼는다. 자신들을 핍박하고 박해했으나 신자들은 이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새 신자들은 이에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인내와 친절과 겸손으로 저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정다운 권고까지 해줬으므로 저들도 감동해 천주교에 입교했습니다. 이렇게 그들도 그리스도 우리 안의 양들이 돼 모두 힘을 합해 새 공소집을 건축했습니다.” 적개심으로 냉랭했던 마을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사랑 가득한 공간으로 변했다. “제가 처음 그 공소집에 갔을 때 그들은 거의 모두가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잘 배웠고 영세 준비를 훌륭히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공소에만도 어른 영세자가 32명이고 유아 영세자가 10명이며, 예비자가 17명이나 됩니다.”

신앙의 힘으로 병을 이겨낸 사람의 이야기도 전한다. 병에 걸려 문밖출입도 못하는 신자를 만난 최양업. 공소까지 이틀이 걸리는 먼 거리이기에 그는 세례받기 위해 공소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세례를 받으러 가는 동무들이 가마를 타고 가자고 제안했으나 그는 “나 같은 죄인이 가마를 타고 편안하게 간다면 오만불손한 짓이 될 것”이라면서 “차라리 나를 지게에 싣고 가주시오”라고 부탁한다. 첫날에 지게에 실려 공소에 도착한 병자는 다음날에는 지게를 버리고 자기 발로 걸을 수 있게 됐다. 최양업은 그의 상황에 대해 “눈이 두 자나 쌓인 험한 산길을 걸으면서도 별로 힘겨워하지도 아니하고 춤추다시피 성큼성큼 뛰어서 공소에 도착했습니다”라고 전한다. 우여곡절 끝에 세례를 받은 그 사람은 “천상의 환희에 가득 넘쳐 영혼도 낫고 육신도 나아서 이중으로 건강하게 돼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최양업은 밝힌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