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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41)1859년 10월 12일 안곡에서 보낸 열여덟 번째 서한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10-25 수정일 2022-10-25 발행일 2022-10-30 제 3316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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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천리 걸어도 못 만난 신자들 생각에 아쉬움 토로

전라·경상·강원·충청·황해도 걸친 지역
100개 넘는 공소 다니며 신자들 만나
제주에서 상경한 김기량 소식도 전하며
천주교 엄금하는 조선 정부를 향해
프랑스가 신앙 자유 요청 해주기를 희망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최양업 신부의 모습을 표현한 동상. 청주교구 배티성지에 세워져 있다.

1850년 1월, 사목을 시작한 최양업은 9년간 쉬지 않고 5개도의 교우촌을 순방한다. 특히 최양업은 서양 선교사들이 가기 어려운 험준하고 외진 곳에 위치한 교우촌들을 찾았다. 해마다 그가 걸었던 거리는 7000리가량. 평지를 걷기에도 힘든 거리였지만 최양업은 높고 험준한 고개를 넘으며 쉼 없이 걸었다. 1859년 안곡의 교우촌에서 보낸 편지에는 그의 고된 여정이 녹아있다.

■ 하루에 40리 걷고도 더 걷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최양업

사목순방을 하며 매일 15㎞를 걸었음에도 최양업은 “하루에 고작 40리밖에 못 걷습니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1859년 무렵 최양업의 사목관할 구역은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황해도에 걸쳐 있었다. 그가 방문한 공소는 100개 이상으로, 베르뇌 주교는 파리 신학교 교장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55년 1월 22일자 서한에서 “최양업 신부가 한해에만 4500명의 고해성사를 들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1857~1858년 페롱 신부의 순방 거리가 3500리 이상이었다면 최양업은 2배가 넘는 7000리를 걸었다. 1년에 2700㎞ 넘게 걸은 것이다.

최양업은 자신의 사목여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저 혼자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허약합니다. 그래서 갈 길이 먼 공소 순회 때는 항상 말을 타고 갑니다. 멀리 떨어진 지방들은 다 제가 순방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제가 다니는 거리는 7000리가 넘습니다.”

오랜 사목순방을 하며 쌓였던 여독을 풀 여유조차 없었지만 최양업이 유일하게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순간은 페롱 신부와 만날 때다.

“저의 관할구역은 넓어서 무려 다섯 도에 걸쳐있고, 또 공소가 100개가 넘습니다. 그렇지만 여름철 장마나 무더위나 농사일 때문에 순회할 수 없는 몇 달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허가가 있어도 제가 쉴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름에는 페롱 신부님의 관할구역으로 가서 안곡이라는 교우촌에서 여름휴가를 지냈습니다.”

최양업의 사목에 대한 열정은 순방 초기부터 시작됐다. 1851년에 최양업 신부가 만난 신자는 5936명으로 조선대목구 전체 신자(1만2000명가량)의 49%에 달한다. 선종하기 1년 전인 1860년 최양업이 입교시킨 영세자 수는 203명으로 전체(504명)의 40.3%다.

■ 신앙 자유 위해 프랑스에 도움 청해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을 만나 판공성사를 준 최양업은 “난파선에서 구출된 제주도 사람은 자기 집안이나 제주도 사람을 입교시키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답니다”라고 전한다. 천주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있음에도 현 정세 하에서 천주교를 믿고 실천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다는 것을 최양업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참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혼이 구원되기를 원하면서도 천주교를 엄금하는 조선 법령에 대한 공포 때문에 천주교 신앙을 고백할 만한 용기와 담력이 모자랍니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특히 남편과 부모들 지배 아래 있는 여인들이 장애에 막혀 날마다 울음으로 지내며 한숨으로 쇠약해지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최양업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리브와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천주교 국가의 군주들이 우리나라의 이처럼 많은 영혼의 안타깝고 참혹한 처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지체 없이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로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의 구원을 마련해주기가 별로 어렵지 않을 텐데 말씀입니다. 프랑스 정부에서 한번만 공식적으로 백성들에게 천주교를 믿을 신앙의 자유를 주라고 우리 조선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는 경고문을 보낸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우리 조선 조정에서 이 요구를 감히 반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