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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42)1860년 9월 3일 죽림에서 쓴 열아홉 번째 서한①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11-01 수정일 2022-11-01 발행일 2022-11-06 제 331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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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상황에도 신앙 지킨 신자들의 찬란한 믿음
신앙 자유 꿈꾸며 믿음 이어간 신자들
확산되는 교세 꺾으려 경신박해 시작돼
가진 것 전부 빼앗기고 모진 문초 당해
신앙 지킨 신자들 굳은 믿음 기록했지만 
박해로 흔들리는 교우들에 대한 걱정도 

최양업 신부가 박해를 피해 숨어 지냈던 죽림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저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최양업은 죽림에서 쓴 마지막 서한에서 이같은 심정을 토로한다.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신자들과의 만남에서 힘을 얻어 멈추지 않고 걸어온 길. 그 여정의 끝에서 최양업은 큰 위기를 맞는다.

■ 1859년 시작된 박해, 신자들 위기로 몰아넣다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긴 어려웠으나, 대규모 박해가 없어 전국 곳곳의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왔던 신자들. 1858년 10월 오두재에서 보낸 서한에서 “머지않은 미래에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리라고 예언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며 신앙의 자유를 꿈꿨던 최양업은 불과 2년 만에 큰 위기를 맞는다. 경신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1859년 말부터 1860년까지 이어진 경신박해는 천주교에 대해 개인적으로 반감을 품고 있던 좌포도대장 임태영과 우포도대장 신명순에 의해 일어났다. 천주교 교세가 날로 확산되자 임태영과 신명순은 조정의 허락 없이 서울과 지방의 교우촌을 급습,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해 서울로 압송시킨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재산을 약탈하고 가옥에 방화한 것이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 집안의 호조판서 김병기, 병조판서 김병운 등이 천주교인 체포를 반대했다. 다행히 박해는 잦아들었지만 9개월간 이어진 핍박과 약탈로 많은 신자들이 피해를 입었다.

최양업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포졸이 사방으로 파견돼 선교사 신부님들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할구역에서 열일곱 명의 신자들이 체포됐는데 남자가 열네 명이고 여자가 세 명이라는 소식이 저에게 전달됐습니다. 그 밖의 교우들도 특히 이 도의 신자들은 거의 모두 자기 마을에서 쫓겨났고 집과 전답과 생활필수품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받을 데도 없고 몸 붙여 지낼 곳도 없이 극도로 처참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교우들이 감옥으로 끌려간 마을에서는 포졸들이 모든 것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습니다.”

가혹한 고문을 당해낼 재간이 없던 신자들은 배교를 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혼란스런 상황에서 신앙을 지킨 신자들의 믿음은 더욱 찬란히 빛났다.

“아주 열심한 신자인 노파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리를 설명해 많은 신자로 이뤄진 교우촌을 세웠고 철저한 교리교육과 신심의 모범으로 그 교우촌을 지탱해 왔습니다. 노파는 체포돼 문초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를 용맹히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그 상처 때문에 순교했습니다.”

“경주 감옥에 갇혀있던 열 명의 신자들은 세 차례나 문초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문초를 당할 때마다 용감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했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처참하게 고생하면서도 신앙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최양업 신부가 1860년 9월 3일 쓴 열아홉 번째 서한.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어렵게 일군 교세, 박해로 꺾이다

최양업이 사목방문을 시작한 1850년 1만1000여 명이었던 신자는 꾸준히 증가해 1859년에는 1만6000명을 넘어섰다. 땀과 믿음으로 일군 결과였기에 최양업은 박해로 인해 교세가 위축될 것을 우려했다.

“박해 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해 사방의 많은 외교인 중에서 예비 신자들이 속출하므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고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 전체가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얼마나 열성적으로 배우는지 서로 경쟁을 하기도 했답니다.”

박해가 있기 전, 천주교의 기세가 확산되고 있었고 신자들이 늘어나자 최양업이 관할하는 구역에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 예비 신자들도 10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시작된 박해는 전국으로 번졌고, 그 결과 새로운 신자를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용감하게 신앙을 지킨 신자들조차 잃을 위기에 처했다.

“이번 박해로 모든 외교인이 천주교를 박멸하기 위해 무장하게 됐고 마을마다 천주교의 인기는 뚝 떨어지고 아직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들은 실망하며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냉담 교우로 보입니다. 오늘까지 굳세고 용감하게 신앙을 지킨 교우들까지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