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특집] 일본 나가사키 세계유산 순례의 길을 가다 (하)

일본 나가사키 방준식 기자
입력일 2022-12-06 수정일 2022-12-07 발행일 2022-12-11 제 3322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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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고문과 공포조차도… 주님 향한 믿음 빼앗지 못했네
끓는 물 끼얹는 혹독한 형벌
정권의 불의와 탄압 속에서도
믿음 지켜낸 일본교회 신자들
찬란한 신앙 역사 영원히 남아 

일본 초기교회 역사는 앞을 한 치도 내다볼 수 없는 길고 거대한 터널과도 같았다. 상상조차 힘든 무자비한 탄압과 비극으로 점철된 박해의 역사. 과연 이 땅에 복음이 조금이라도 자리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직접 둘러본 나가사키 세계유산 순례의 길에는 모진 박해에도 십자가를 당당하게 내걸었던 일본 초기교회 신자들의 숨결이 묻어 있었다. 눈앞의 이익만을 쫓아 불의를 행한 정권 앞에서도, 배교를 강요하며 지옥과도 같은 형벌로 탄압했던 금교 정책 앞에서도, 신자들은 의연히 고난을 감내했고 오직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며 후손에 신앙을 전수해나갔다. 결국 주님의 뜻은 이루어졌다.

일본 나가사키현 운젠시 운젠지옥 언덕에 있는 순교기념비와 십자가. 운젠지옥에서 일본인 신자들이 고문당했으며 33명이 순교했다.

유황 수증기로 뒤덮인 운젠지옥 전경.

운젠지옥에서의 박해와 순교 장면을 묘사한 시마바라 교회당 스테인드 글라스.

■ 땅에서의 지옥, 그러나 하늘에서 구원받으리니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반도(島原半島)에 있는 운젠(雲仙)시는 온천으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고 있다. 일대의 운젠산(雲仙山, 해발 1359m)은 운젠다케(雲仙岳)와 후겐다케(普賢岳)라는 두 개의 큰 봉우리에서 가스가 계속 분출되고 있는 활화산이다.

고급호텔 등 숙박시설이 화려하게 관광객을 맞고 있는 온천마을 옆으로는, 마치 ‘땅 위의 지옥’을 연상시키듯 매캐한 냄새와 함께 유황 수증기를 거침없이 쏟아 내고 있는 ‘운젠지옥’(雲仙地獄)이 자리하고 있다. 멀리서도 코를 자극하는 유황 냄새와 뜨거운 열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수증기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지 않는다면 제대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다.

120℃를 넘기며 연달아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와 함께 유황 온천수가 끓고 있는 곳. 바로 이곳에서 1627~1632년에 걸쳐 금교 정책으로 끌려온 신자 ‘기리시탄’(キリシタン) 수천 명이 언덕에서 뜨거운 온천수를 몸에 끼얹는 등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끝내 배교를 거부한 33명은 언덕에서 온천수 아래로 강제로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처형됐다. 운젠지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이들을 기리는 순교비와 십자가가 있다. 매년 5월 나가사키대교구는 이곳에서 순교제를 지낸다.

시마바라 반도 일대의 천주교 박해 역사는 신앙을 지키려는 신자 농민들이 주축이 된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乱)으로 이어진다. 1637년 시마바라와 아마쿠사(현 구마모토(熊本)현 일대) 지역 영주가 세금을 마구 징수하고 천주교 탄압을 일삼자 3만7000여 명의 농민들이 봉기한 것이다. 그러나 막대한 양의 무기로 무장한 막부군(幕府軍)을 이기지 못한 봉기군은 전멸했다. 이들의 시신 중에는 탄환이나 포탄 파편으로 만든 십자가나 묵주를 입 안에 물고 있는 흔적도 발견됐다. 그 역사 기록은 시마바라성(島原城)에 있는 기념관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1997년 건립된 ‘시마바라 교회당’(カトリック島原教会)은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지정돼 불의와 탄압에 맞섰던 신앙선조들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미나미시마바라시 주택가에 있는 일본 최초 소신학교 ‘아리마 세미나리요’ 옛터.

미나미시마바라시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기념관’에 있는 순교기념조각.

아리마가와 순교지에 있는 십자가.

시마바라시에 있는 시마바라 교회당 전경.

■ 주님 위해 생명 바친 신자들, 간절했던 신앙 영원히

시마바라 반도 최남단에 있는 나가사키현 미나미시마바라(南島原)시에는 일본 최초의 소신학교이자 종합교육기관이었던 ‘아리마 세미나리요’(有馬のセミナリヨ) 옛터가 있다. 이 지역 영주였던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위해 세례를 받으면서 천주교 선교가 가능해졌고, 예수회가 1580년 ‘아리마 세미나리요’를 설립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의 학생은 총 22명이었으며 라틴어와 포르투갈어, 미술과 음악은 물론 화약술을 배우기도 했다.

특히 이토 만쇼(伊東マンショ), 치지와 미구엘(千々石ミゲル), 나카우라 줄리안(中浦ジュリアン), 하라 마르티노(原マルチノ) 등 10대 학생 4명은 ‘덴쇼(당시 일본의 연호) 소년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이라는 이름으로 1582~1590년 일본 최초로 유럽에 파견됐다. 예수회 선교사 발리냐노(Valignano) 신부가 일본 조정을 대신해 학생들이 교황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소년사절단은 스페인 국왕과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을 알현하고 환대를 받았으며 로마 시민권을 받기도 했다. 이탈리아·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 각국을 차례로 방문하고 문화를 배웠으며, 교황으로부터 일본 영주에게 전해줄 선물을 받고 귀국했다.

이들의 업적은 서양 세계에 일본교회를 널리 알리는 한편 동아시아 최초로 유럽에서 활판인쇄기를 들고 와 일본에서 교리서를 인쇄함으로써 선교 활동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소년사절단 중 배교한 치지와 미구엘을 제외한 3명은 사제가 됐다. 특히 나카우라 줄리안은 1633년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했으며 2008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시복됐다.

이처럼 아리마 세미나리요 옛터 인근 지역은 활발한 선교활동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금교 정책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희생됐다. 인근 강변에 있는 ‘아리마가와 순교지’(有馬川殉敎地)에서는 1613년 당시 영주였던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가 배교를 거부하는 자신의 신하 3명과 가족 5명을 각각 8개의 십자가에 매달아 주민 2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시켰다. 이후에도 배교를 거부한 신자 17명이 참수되는 등 이 지역에서의 순교는 계속됐다.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기념관’(有馬キリシタン遺産記念館)에서는 나가사키의 천주교 전래와 번영, 가혹한 탄압, 신자 잠복부터 부활까지 자세한 자료를 통해 일련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1550년 예수회 선교사 하비에르(Francis Xavier) 신부가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한 이래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일본 초기교회 신자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신앙의 발자취는 아직도 일본 땅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그리고 신자들의 가슴 속에도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일본 나가사키 방준식 기자 bj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