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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48) 다락골성지에서 최양업 신부를 다시 만나다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12-13 수정일 2022-12-13 발행일 2022-12-18 제 3323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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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안은 골짜기, 최양업 일가 신앙을 잉태하다

조부 최인주의 정착으로 형성된 교우촌
최양업 신부 탄생지며 유년기 보낸 곳
홍주와 공주에서 치명당한 시신들 옮겨
한 봉분에 여러 명 줄지어 묻은 ‘줄무덤’ 
무명 순교자들 무덤 37기 모셔져 있어

다락골성지 대성당 로비에 마련된 최양업 신부 기념관.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 오소산 기슭에 자리한 다락골은 ‘달을 안은 골짜기’라는 뜻처럼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가운데 오랜 시간 변치 않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주 최씨 문중은 350여 년 전부터 다락골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가 신해박해(1791) 때 피난해 정착함으로써 유서 깊은 교우촌이 됐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최양업이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오소산 산줄기 넘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바쳤을 최양업. 다락골에서부터 단단해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훗날 그가 사제의 길을 걷는데 큰 힘이 됐다. 하느님,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온 생애를 바쳤던 최양업 신부의 시작을 다락골 성지에서 찾을 수 있다.

■ 최양업 신부의 신앙, 충청남도 청양에서 시작되다

최경환 성인 집안은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최상진이 1787년경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우면서부터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들은 서울에 살았으나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거처를 옮겼다. 성숙하고 안정된 신앙생활을 위해 선택한 곳은 당시 친척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이었다.

차령산맥의 줄기가 지나는 청양군은 대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대가 높은 편이다. 산골 깊숙한 곳에 있는 이곳에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 최양업의 조부 최인주는 다락골에 터를 잡았다. 최인주가 이주하면서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알렸고, 다락골 마을은 자연스럽게 교우촌으로 변모하게 됐다.

최인주와 그의 어머니 경주 이씨는 다락골로 들어와 개간해 살림을 이어갔다. 이때 개간했던 땅이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의 새터(新垈)다. 당시 새터로 이웃들이 모여 들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최인주의 셋째 아들 최경환이 이곳에서 자랐고, 그의 아들 최양업도 다락골의 입구인 새터에서 태어나 신앙생활을 했다.

이후 최양업의 가족들은 신자들이 많이 사는 서울로 이사했다가 안양의 수리산 담배 마을에 정착해 교우촌을 만든다. 최양업이 사제가 되고 사목활동을 하던 당시까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됐던 다락골 교우촌은 병인박해(1866) 이후 사라지게 됐다. “동네를 전부 불 질렀다”는 포졸들의 말을 통해 다락골 교우촌의 마지막을 추정할 뿐이다.

다락골성지에는 병인박해(1866) 때 치명당한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 37기가 모셔져 있다.

■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흔적 남아있는 다락골성지

2003년 2월 17일 대전교구는 청양 다락골성지를 성지본당으로 설정하고 상주사제를 임명해 성지 개발 및 보존과 순례자와 인근 교우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토록 했다. 또한 교구 설립 60주년을 기념해 2008년 11월 9일 최경환 성인 일가와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영성 및 선교 정신을 널리 현양하기 위한 기념성당을 다락골성지에 건립했다. 2019년 10월 3일에는 성지 대성당 안에 최양업 신부 기념관을 만들고 축복식을 열었다.

다락골 초입, ‘최양업 신부 생가터’ 이정표를 지나 1㎞가량 들어가면 다락골성지를 만날 수 있다. 성지에 들어서면 소성당과 대성당 뒤로 자연 속에서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는 기도공원이 조성돼 있다. 길을 따라 오르면 다락골의 아픈 박해의 역사가 남아있는 줄무덤이 순례객들의 기도를 기다리고 있다.

줄무덤이란 이름은 한 봉분 속에 황급히 줄을 지어 가족끼리 시신을 묻었다 해서 붙여졌다. 병인박해(1866) 때 홍주와 공주 감영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고, 신자들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무명 순교자들의 시신을 경주 최씨 종산으로 옮겨 묻었다. 시신을 옮긴 신자들은 최양업 신부 집안 사람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1920년대에 공주에 살았던 송 아오스딩의 증언에 따르면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250여명의 교우가 치명당하셨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느라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고 전하고 있다.

제1·2·3구역으로 구분된 줄무덤에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 37기가 있다. 청양본당에서는 이곳에 무명 순교자 묘비를 세우고 1982년 11월 23일 묘비 제막식을 열었다. 1986년 2월 16일 줄무덤에서는 150년 된 십자고상과 묵주 1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한편 최양업이 태어난 새터는 복원사업이 결정돼 공사가 진행 중이다. 2023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한 새터에는 박물관과 성당이 건립될 예정이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