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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눈] 가정 공동체의 의미 / 이미영

이미영 발비나,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3-05-09 수정일 2023-05-09 발행일 2023-05-14 제 334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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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퇴근하면, 스마트폰을 얼른 켜보라는 시어머니의 재촉이 쏟아집니다. 조카가 낳은 아기, 저에게는 종손녀요 시어머니께는 증손녀인 귀여운 아기의 하루 일상이 담긴 온라인 가족 앨범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먹는 것, 노는 것, 잠자는 것 등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지만, 울고 웃는 귀여운 아기의 하루는 매일 똑같은 듯하면서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성장 과정을 보여주어 볼 때마다 신기하기만 합니다.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것을 큰 부담으로 여기는 시대에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어 예쁘게 아기를 키우고 있는 조카의 모습을 보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과 생명의 기쁨이 절로 느껴집니다.

한편, 이렇게 생명력 가득한 조카의 가정 모습을 둘러보다가, 요양병원에서 어머니를 간병하는 친구가 올리는 SNS를 보면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친구는 나날이 쇠약해지는 어머니를 곁에서 돌보면서, 매일 선종을 위한 기도를 올립니다. 장수가 큰 복으로 여겨지던 예전과 달리, 길어진 수명은 더 나아질 희망도 없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연장되는 벌처럼 여겨지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그 고통의 시간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부담을 줄까 봐, 혹은 가족들의 바쁜 일상에 밀려 외롭게 버려질까 봐 더 두려운 것이 어르신들의 마음인 듯합니다. 그 마음을 읽고 아프신 어머니의 곁을 정성스레 지키며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 고통의 순간에도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절로 느껴집니다.

누군가는 역시 딸밖에 없다고 하겠지만,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주위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시어머니를 10여 년 가까이 집에서 모셨던 성당 언니를 떠올려 보면, 딸이고 며느리고 주어진 관계나 역할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대하는 삶의 태도에 따라 달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병자를 집에서 돌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언니는 힘들 때마다 성당으로 달려가 성체조배를 하며 하느님께 원망도 하고 위로도 받으며 시어머니께서 선종하실 때까지 그 힘든 시간을 잘 이겨냈습니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결국 홀로 겪어내야 하는 것이지만, 곁에서 동반하는 누군가가 함께할 때 그 고통을 잘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정은 삶의 기쁨도 함께 나누지만, 그런 고통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첫 번째 공동체라는 것을 여러 가정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정 공동체를 이루는 이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가족 구성원의 관계도 고통의 순간에 쉽게 약해지고 허물어지며, 가족의 힘으로도 감내키 어려운 사회적 상황이 점점 늘어가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2022년 합계출생률이 0.78명이요, 1인 가구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보다 더 많아지는 한국 사회에서는 앞으로 가정 공동체의 형태나 의미도 빠르게 바뀔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혼인·혈연관계와 상관없는 다양한 형태의 생활공동체를 인정하고, 사회가 이를 법률적으로 보호하도록 하는 ‘생활동반자법’이 최근 발의된 것도 아마 이런 사회 변화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 법이 가정 공동체의 고유성을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혈연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신앙 가족으로 그 친밀함과 관계성이 확장되기를 바라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 사회가 서로를 돌보는 큰 가정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듭니다. 어르신들을 빨리 치워버려야 할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일구느라 고생하신 부모님을 대하듯 감사하는 마음으로, 태어나는 아기들을 우리 사회 미래 보장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도 생명의 기쁨을 전하는 귀한 자녀로 사랑하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웃과 이주민을 우리의 형제자매로 여기는 가정 공동체가 되는 사회가 어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정의 의미는 아닐까요.

이미영 발비나,우리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