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 주일 기획] 미디어 선교에 투신한 현대 성인들
죽음 앞에서도 진실 알리는 일 멈출 수 없어
성체 향한 뜨거운 사랑, 온라인으로 널리 전파
손으로 직접 성경과 교리서를 써서 신앙을 알렸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쉽고 빠르게 복음을 알리는 게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때보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 그저 수많은 정보 중 하나로 신앙을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지금, 복음 선포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현대의 성인과 복자를 소개한다. 성 티투스 브란즈마 신부와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의 삶은 각자 주어진 자기 자리에서 본분을 충실히 실천할 때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언론인 순교자 티투스 브란즈마 신부(Titus Brandsma·1881~1942)
“가톨릭신자로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독일 나치의 탄압이 네덜란드까지 가해졌던 1940년대. 네덜란드 가톨릭계 신문의 기자였던 티투스 브란즈마 신부는 독일 나치의 광고와 보도자료를 신문에 실으라는 지시를 거부했고, 심문관이 국가 규정을 어긴 이유를 묻자 이같이 답했다. 복음의 가르침에 반하는 정보, 진실이 아닌 정보를 알리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르멜 수도회 수도자이자 언론인이었던 브란즈마 신부는 가톨릭 언론의 자유를 외치다 순교했고 1985년 시복된 이후, 37년만인 2022년 5월 15일 시성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브란즈마 신부를 비롯한 9명의 복자를 시성하며 “오늘 시성된 성인들은 어떤 대가나 세상적인 영광을 기대하지 않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며 “그 결과 그들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발견하고, 주님의 역사를 찬란하게 증거했다”고 밝혔다.
브란즈마 신부가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1940년대,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한 이후 네덜란드교회에 대한 탄압이 확산됐다. 나치는 가톨릭계 학교에 유다인 학생을 퇴학시키라고 명령했을 뿐 아니라 사제와 종교인의 고등학교 교장직을 금지하고, 가톨릭 언론을 검열했다.
유다인뿐만 아니라 현지인 사제들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 하지만 브란즈마 신부는 그릇된 것을 모른척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줄곧 나치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고, 사람들을 만나 진실을 알리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결국 나치에 저항하는 내용을 기사화하지 말라는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1942년 1월에 강제 수용소로 이송됐다. 동료 수감자들에 따르면, 힘든 노동으로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브란즈마 신부는 굶주린 사람들과 적은 배급량을 나누고 유다인 수감자들을 특별히 돌보겠다고 말했다. 브란즈마 신부에게 독극물 주사를 놓은 간호사는 훗날 “나를 불쌍히 여겼던 그 신부의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증언했다. 간호사에게 묵주를 주며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를 바치라고 격려한 브란즈마 신부. 그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우리는 여기 어두운 터널에 있지만 계속 나아가야 한다”라며 “마지막에는 영원한 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다”고 전했다.
죽음 앞에서도 신앙인이자 언론인의 사명을 끝까지 지켜낸 브란즈마 신부. 그의 삶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때론 용기가 필요하지만 각자 주어진 자기 자리에서 본분을 충실히 실천할 때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에서 “성덕은 영웅적인 몸짓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수많은 사소한 행위로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이소영 기자 lsy@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