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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성인들] (14) 성 마리아 고레티(1890~1912)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23-07-04 수정일 2023-07-04 발행일 2023-07-09 제 335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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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7월 6일
정결 지키려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을 찌른 죄인을 용서

자신을 위협한 청년에게 저항하다
열네 차례 칼에 찔려 목숨 잃어
죽음에 임박했음을 감지하면서도
죄인의 용서를 해야할 일로 여겨

잘못 부인하며 용서 거부했던 청년
용서의 은총 입고 진심으로 뉘우쳐

미국 미네소타주 성 바오로 대성당의 성 마리아 고레티 스테인드글라스. 위키미디어 제공

성 마리아 고레티(Maria Teresa Goretti)는 자신을 겁탈하려던 청년으로부터 목숨을 다해 자신의 정결을 지켰고, 불과 11살의 나이에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자를 용서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지난 2002년 7월 6일 마리아 고레티 선종 100주년 기념 메시지에서 그를 “교회와 인류의 희망인 젊은이들의 모범”이라고 칭송했다. 고(故)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이 사제의 길을 걷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며, 정 추기경이 처음으로 번역해 출간한 책도 「성녀 마리아 고레티」였다.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어린 성인 중 한 명으로 ‘20세기의 아녜스 성녀’로 불리는 청소년의 수호성인 마리아 고레티의 삶을 알아본다.

아버지를 여읜 가난한 시골 소녀

마리아 고레티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안코나주 코리날도에 살던 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셋째 아이로 태어났다. 큰오빠 안토니오는 어릴 적 죽었고, 작은오빠 안젤로와 마리노·알레산드로·에르실리아·데레자 네 동생이 있었다. 아버지 루이지와 어머니 아순타는 가난했지만 서로 사랑하며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기도법을 알려주는 등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마리아 고레티는 어려서부터 상냥하고 총명하며 예의가 발랐다. 하지만 시골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다섯 살 무렵인 1896년, 그의 부모는 그나마 갖고 있던 작은 농장마저 팔고 다른 지주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모는 땅을 부치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다. 로마 남쪽 콜레 잔투로로 이주했다가 1899년 지금의 라치오주 네투노 인근 레 페리에레 디 콘카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 루이지는 열심히 일했지만 마리아 고레티의 가족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루이지는 힘든 노동과 열악한 기후로 건강까지 나빠졌고, 1900년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루이지의 죽음으로 가족의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어머니와 오빠, 남동생들은 농장에 나가 일을 해야 했으며, 마리아 고레티는 집안 살림을 돌보며 아직 어렸던 막내 동생 테레자를 돌봤다.

2015년 10월 7일 미국 보스톤 성 십자가 대성당에서 한 신자가 성 마리아 고레티의 유해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CNS 자료사진

목숨으로 정결을 지킨 마리아 고레티

레 페리에레로 마리아 고레티의 가족이 이주했을 때 이들은 다른 형편이 어려운 한 가족과 한 집에 살았다. 세레넬리 가족으로, 아버지 조반니와 아들 알레산드로였다. 아들 알레산드로는 한 집에서 지내던 마리아 고레티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해 겁탈할 기회를 노렸다.

1902년 7월 5일, 마리아 고레티는 집 앞 계단에 앉아 막내 테레자를 돌보며 알레산드로의 셔츠를 수선하고 있었다. 그때 마당에서 콩을 타작하고 있던 알레산드로는 집 안에 어른들이 없는 것을 알아채고는 칼을 들고 와 마리아 고레티를 위협하며 강간하려 했다. 마리아 고레티는 알레산드로의 요구에 “안 돼! 이것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야!”라며 완강히 거부했다. 마리아 고레티가 끝까지 버티자 알레산드로는 이성을 잃고 칼로 그를 14차례나 찌르고 도망쳤다.

테레자의 울음소리에 놀라 집으로 급히 돌아온 어머니 아순타와 알레산드로의 아버지 조반니는 피범벅이 된 채 마루에 누워있는 마리아 고레티를 발견하고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다. 상처가 너무나 심해 마취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술에 들어갔지만, 의사도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의사는 수술 중 겨우 의식을 되찾은 마리아 고레티에게 “천국에 가게 되면 나를 생각해다오”라고 말했고, 마리아 고레티는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천국에 갈까요?”라고 되물었다. 의사가 “마리아 너 일꺼야”라고 답하니 마리아 고레티는 “그렇다면 알겠어요. 천국에 가면 선생님을 기억할게요”라고 답했다.

이튿날 마리아 고레티는 병원을 찾아온 본당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마지막 영성체를 했다. 정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마리아 고레티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던 1902년 7월 6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성 마리아 고레티의 유해.

용서의 기적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감지한 마리아 고레티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알레산드로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마리아 고레티는 경찰에게 자신을 찌른 이가 알레산드로라고 밝혔지만 “그를 용서한다”면서 “그가 나와 함께 천국에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알레산드로는 오랫동안 마리아 고레티의 용서를 거부했다. 30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알레산드로는 처음 3년 동안 자신의 잘못을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교도소를 사목방문한 도반니 블라디니 주교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전하며 회개했다. 그는 꿈에 마리아 고레티가 백합꽃을 자신에게 선물했는데, 자신이 받자마자 꽃이 불타버렸다고 밝혔다. 알레산드로는 마리아 고레티의 용서가 자신이 죄를 숨기려했던 것보다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비로소 참회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진심으로 뉘우친 알레산드로는 모범수로 형기를 마치고 마리아 고레티의 어머니 아순타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아순타 역시 자신의 딸이 이미 용서했다며 그를 껴안고 용서했다. 둘은 함께 미사에 참례하기도 했다. 알레산드로는 나중에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해 1970년 죽을 때까지 청지기와 정원사로 일했다.

1950년 6월 24일 열린 마리아 고레티의 시성식. 마리아 고레티의 시성식은 사상 처음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봉헌됐다.

‘20세기의 아녜스 성녀’

마리아 고레티는 1947년 4월 27일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봉헌된 시복식 미사에는 어머니 아순타와 알레산드로도 참례했다. 아순타는 딸의 시복을 지켜본 최초의 어머니가 됐다.

3년 뒤인 1950년 6월 24일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 고레티를 시성했다. 그의 시성식을 지켜보기 위해 수많은 군중이 몰리자 시성식 미사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봉헌됐다. 성 베드로 대성당 바깥에서 열린 최초의 시성식이었다. 이날 약 50여 만 명이 시성식을 지켜봤고 대다수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었다.

비오 12세 교황은 라틴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로 그의 시성을 선언했다. 그는 “마리아 고레티 성인은 엄청난 용기로 자신의 정결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며 목숨을 내어놓았다”면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추구할 소명을 받았고 마리아 고레티가 보여준 모범을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