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명예기자 단상] 낮은 곳으로 내려간 사람들 / 윤선경

윤선경 수산나 명예기자,
입력일 2023-11-21 수정일 2023-11-21 발행일 2023-11-26 제 3369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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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가톨릭신문사에서 「유스토 다카야마 우콘」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그곳에 참석한 나는 저자 후루스 가오루 신부의 강연을 들었는데, 잊히지 않는 말이 있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밀어닥쳤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을 구하러 낮은 곳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책은 복자 다카야마 우콘에 관한 내용인데…. 궁금해진 나는 최근 다시 책을 찾아 읽었다. 책의 머리말에 그 글이 있었다.

밀어닥친 검은 파도 아래에서 “고지대로 피하십시오. 살아야 합니다!” 하고 외치던 사람들. 사회복지사, 소방관, 경찰관, 평범한 마을 사람들. 그들은 낮은 곳으로 내려와 생명의 방향을 알려준 사람들이었다. 이 일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극심한 경쟁으로 행복을 잃고 고독사가 만연했던 일본인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400년 전 일본, 전란의 와중에 묵묵히 세상을 바꾸어가던 한 인물이 있었다. 유스토 다카야마 우콘. 서양의 과학에 목말라하던 집권자는 선교사를 환영했다. 덕분에 신자는 고요히 늘었다. 하지만 곧 선교사 추방령이 내렸고 우콘은 모든 지위를 잃었다. 28년간의 궁핍하지만 평화로운 삶.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을 적셨다. 이어진 해외 추방령. 우콘은 마닐라에 도착 후 40일 만에 선종했다. 우리는 두 부류의 순교자를 현양한다.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이, 신앙을 삶으로 실천한 이. 그런 의미에서 다카야마 우콘은 조선의 최양업 신부에 비견된다.

지난 여름 속리산 자락에 위치한 멍에목성지에서 완공을 앞둔 작은 성당을 보았다. ‘최양업 신부 세례 성당’이라 했다. 성지를 다녀온 후 최 신부의 서한집을 찾아봤다. 여덟 번째 서한에 그곳이 있었다.

화재로 마을이 몽땅 타버렸다. 마을을 찾아온 외교인 조씨는 이러한 재난에도 평온한 마을 사람들이 이상했다. 그가 캐묻자 신자들이 실토했다. “우리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좋은 일이나 궂은일이나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으니,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 의탁하며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안배를 칭송할 뿐입니다.”

일본 가톨릭교회는 유입된 지 100년이 채 안 되어 마지막 신부가 순교하면서 그 명맥이 끊어졌다. 일본인 전도사 바스찬이 “7대가 지나 교황의 배가 올 것이고 독신의 신부가 마리아 상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말을 믿는 사람이 있었을까? 250년이 지나 남루한 차림의 아이와 어른 십여 명이 나가사키의 오우라 천주당을 찾아왔다. 그들 중 한 부인이 신부에게 물었다. “성모님의 성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쓰나미가 닥쳤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구하러 달려간 이들, 멍에목에서 하느님께 전신을 의탁하며 산 이들, 박해를 피해 신앙을 유산으로 전한 일본의 가쿠레 기리스탄, 이들은 모두 자기를 낮추어 낮은 곳을 찾아간 사람들이다.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 “왜 하필 나에게?” 원망할 대상을 찾기보다 ‘예수님의 뜻은 무엇일까?’를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선물로 받을지 모른다. 혹 마음이 산란해 답을 찾지 못한다면 곰곰이 12년 전 그날, 낮은 곳을 향해 달려간 이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윤선경 수산나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