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주일 르포] 그리스도 희망의 빛 기다리는 HIV 감염인 쉼터 ‘새빛공동체’
존재를 거부당하는 고통만큼 큰 게 있을까. 누군가 뜻 없이 비아냥거린 한마디도 일생 가슴속 빠지지 않는 비수가 되듯, 거부는 그 경중과 상관없이 인간을 벼랑 끝까지도 내모는 십자가다.
HIV 감염인들은 거부의 십자가 중에도 가장 무거운 걸 짊어진 이들이다. “불치병을 옮기는 두려운 존재”라는 편견을 감내하는 이들을 위해 성 골롬반 외방 선교 수녀회는 2000년 서울 성북구에 ‘새빛공동체’(책임 김계숙 마르티나 수녀) 쉼터를 열어 거주, 건강 회복, 섭생, 사회 복귀를 위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 왔다. 하루하루 죽음으로 기울던 감염인들은 새빛공동체와 만나며 생명을 되찾는 ‘새 빛’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안개 속 드리운 빛줄기
해 뜰 녘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11월 20일 늦은 아침, 성북구 어느 인적 뜸한 주택가 골목을 찾았다. 사람의 온기 없이, 안개 낀 날씨에 물들어 더 쓸쓸했다.
한 평범한 가정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사부작거리는 인기척, 철문이 열리며 쇠붙이끼리 스치는 파열음이 상쾌하게 적막을 깨뜨렸다. 점심을 짓느라 더운 김이 풍기는 부엌에 발을 디뎠다.
“우리 쉼터에 어서 오세요~”
새빛공동체 식구들 목소리가 초겨울 공기를 삽시간에 녹였다. 여느 평범한 가족처럼 사람의 온기 가득한 집밥이 차려지고 있었다. 무를 두툼히 썰어 넣은 고등어조림, 주방 담당 식구의 특제 참깨 드레싱에 버무린 샐러드, 도라지가 절반인 오이무침, 따끈한 배춧국, 가지볶음….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며 식사하는 식구들 얼굴에는 미소만이 가득했다.
이렇듯 새빛공동체는 감염인들의 균형 잡힌 식단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 정상적 영양 섭취만으로도 HIV 바이러스에 의한 면역 세포 파괴를 막을 수 있는 만큼 등 푸른 생선과 고기반찬을 자주 먹는다. 바이러스 증식 억제제도 환자가 잘 먹어야 잘 듣는다.
“밥만 잘 먹이는 게 목적이 아녜요. 식사는 이들이 유대감을 맺는 시간도 돼요.”
김계숙 수녀가 식구들과 커피를 마시러 마당으로 나서며 이야기했다. 김 수녀는 “다른 감염인 쉼터의 경우 각자 알아서 밥을 먹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미 가족, 사회, 벗들로부터 거부당한 그들은 그렇게 한 번 더 고립되기 쉽다. 그와 달리 새빛공동체는 매일 끼니를 함께하며 서로에게 ‘식구(食口)’가 돼준다.
“밥을 먹어야 약을 먹죠. 국에 말아서 한 술만 먹어 볼까요? 아~!”
주방 담당 인열(가명) 씨가 몇 주 전 들어온 새 식구 치환(가명) 씨 어깨를 도닥이며 말했다. 바이러스성 치매를 앓는 치환 씨가 용기를 내 몇 술을 떴다. “잘했어요, 이제 커피 한잔해요!” 하며 치환 씨를 데리고 나가는 식구들. 살짝 고개를 내민 해가 여트막이 비추고 있었다.
희망으로 서로 가족 된 사람들
함께 식사하며 정(情) 나눠
검정고시·자격증 취득 등 사회 복귀 도와
■ 상처 덧들이지 않도록
감염 확진된 그날부터 주어진 ‘거부’의 기억들은 감염인들에게 가장 큰 아픔이다. 직장 등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고립은 물론 가족에게서마저 추방당하는 상처다. 김 수녀는 “HIV 바이러스는 일상생활을 통해 전파되지 않음에도 감염인들이 거부만 당하는 것은 가족조차 그들을 ‘불가촉(不可觸)의 죄인’으로 대하는 잘못된 시선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감염인의 침이나 땀에 든 HIV 바이러스는 감염을 일으키기에는 극소량일뿐더러, 감염인과 한 그릇의 음식을 떠먹어도 전파되지 않는다. 그러나 감염인들이 기존 공동체의 포용 아래 새로운 삶의 기회를 받는 일은 극히 드물다.
감염인들은 집에서 쫓겨나지 않더라도 혼자 철저히 분리된 생활 공간에서 살게 된다. 한 지붕 아래임에도 가족들과 눈도 못 마주치는 사람도 있다. 가족마저 받아주는 공간이 못 됨을 안 감염인들 다수가 가출을 하고 정처 없이 떠도는 노숙자가 된다.
HIV 감염은 완치할 수는 없어도 규칙적으로 약을 먹고 관리하면 건강히 살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먹고 씻고 자지 못하면 면역력이 극도로 저하돼 온갖 감염성 질환으로 죽게 된다는 걸 감염인들도 안다. 그저 반복된 거부의 경험으로 그들 또한 스스로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문란하다’는 오해는 감염인들을 벼랑으로 내몬다. 새빛공동체를 다녀간 감염인 중에는 어려서부터 부모나 보호자 없이 사회 밖으로 내몰렸던 이들도 많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 채 주변 환경에 휩쓸려 감염된 이도 있다.
용서를 모르는 사회는 감염인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덧들인다. 극단적 선택을 여러 번 했거나 우울증, 공황장애를 겪는 환자도 많다. 김 수녀는 “누구나 삶 전체를 거부당하면 삶 자체를 거부하고 자책의 늪으로 빠져들게 마련”이라며 “외면받는 감염인들을 위해 그리스도인은 용기의 ‘새 빛’을 안겨줘야 한다”고 말했다.
■ ‘새 빛’ 향해 내디디는 걸음
점심 식사 후 식탁에는 가죽 공예 장비들이 놓였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각자 만들던 공예품을 꺼내 바늘과 실, 망치와 끌을 들고 작업에 몰두했다. 식당은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이면 ‘새빛마실’ 교실로 변한다. 식구들은 가죽 공예, 재봉 등 기술을 익히며 자신감을 쌓는다.
새빛공동체는 감염인들의 사회 복귀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검정고시 응시뿐 아니라 각종 자격증 취득 등 자활을 돕는다. 일방적 시혜 대상이 아니라 떳떳한 사회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런 응원에 힘입어 ‘새 빛’을 향해 나아가는 식구가 많다. 열심히 공부해 장례지도사라는 새 삶에 안착한 사람, 미용 자격증이나 중장비 자격증을 취득한 이도 있다.
“그래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어요.”
유달리 손재주가 좋은 강수(가명·프란치스코) 씨는 매주 새빛마실 시간에 식구 중 가장 몰두해서 작업한다. 간단한 옷도 만들 줄 알고 패션 감각도 뛰어난 그는 건강과 ‘뷰티’(beauty) 쪽으로 대학교에 편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가 매사에 열정적인 이유는 김 수녀가 늘 말해주듯 “내가 여전히 하느님 안에서 귀하고 사랑받는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강수 씨는 새빛공동체 식구가 된 후, 2014년 방한해 세월호 유가족에게 위로를 전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름으로 세례받았다. 그가 꿈꾸는 ‘새 빛’은 무엇일까. 그는 “하느님이 내게 주신 사랑과 극복을 같은 고통에 있는 이들에게 안겨주는 것뿐”이라고 했다.
새빛공동체는 HIV 감염인 쉼터라는 특성상 비공개로 운영돼 정부 등 여타 기관 도움 없이 수녀회와 소수 후원자의 도움으로만 꾸려가고 있다. 김 수녀는 “아직도 오해에 내몰린 감염인들 안에서 똑같이 거부당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섬기는 노력에 힘을 보태달라”고 전했다.
※ 후원 계좌 : 국민은행 016701-04-016601(예금주 새빛공동체)
※ 문의 : 010-4571-9302(김계숙 수녀)
박주현 기자 ogoy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