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리서의 본 내용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마르 10,2)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서 출발한다.(1과 2항) 이어지는 내용에서 바리사이들은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율법으로 권위와 정당성을 세우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응답한다.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4절과 8절에서 거듭 언급한 ‘한처음(처음)’에 시선을 모으게 한다. ‘한처음’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인간창조를 말한다. 바리사이들이 근거로 내세운 모세의 율법은 원죄의 열매이지, 원래 하느님 계획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처음을 거듭 언급한 것은 역사 안에 실존하는 모든 인간이 죄로 기우는 경향을 가졌지만 한처음의 상태, 곧 하느님의 원래 계획은 여전히 인간에게 빛나고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 양심의 작동과 성장이다.
지금 내 앞에 사과가 하나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사과는 내가 보는 각도에 따라, 빛이 비춰지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사과는 자기가 바라본 모습만 말할 뿐, 사과의 전부를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맛도 보아야 하는데 그 맛에 대한 평가도 모두 다르다. 이제 이 사과를 ‘나/인간’이라고 생각해보자. 나는 ‘나’를 어느 부분에서 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나에 대한 이해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빛을 받는 위치에 따라 사과는 더 선명하고 잘 생겨 보인다. 나/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빛은 하느님이다. 창조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왜 ‘낳음’ 했는지 그분의 계획을 만나야 한다. 이는 세상에 태어난 내가 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참 나를 알게 되면 덤으로 너를 알 수 있고, 인격적 친교를 이루는 참된 행복을 살 수 있다.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해, 만질 수 있는 육으로 세상에 그리고 가정에 들어오셨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5절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실제로 그 사건이 오늘 나에게도 일어났다. 몸 그 자체가 페르소나(persona)로서 성사요 인격의 전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말한다. 이것은 신학적 사고뿐만 아니라 현시대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이원론적 사상에 엄청난 변화를 주는 기재가 됐고, 이 새로운 사유의 논리가 인간 몸이 영과 육으로 분리되지 않는, ‘몸 신학’이라는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나, 나의 삶에 관심을 둔다. 나를 홀로 버려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을 때 나를 위한 계획도 함께 작정해 뒀다. 이 계획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이(나침반과 지도), 이름을 가진 자, 불림 받았고, 선택한 자의 삶이다.
세상이 개인주의와 개인성을 당연한 권리처럼 포장해 주지만, 다른 한편에선 개인의 인격이 침해되고 가정이 지닌 고유한 빛은 퇴색되고 성장기의 젊은이들이 방황하는 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는 한 인간이 ‘낳음’ 받고 인격의 틀이 짜이는 중요한 곳이며 복음의 장소인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으로, 현재 ‘몸·혼인·가정 신학 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신학」, 「그대, 나의 얼굴」 등이 있고, 역서로는 「사상과 영성」,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