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이는 큰 신비입니다”(에페 5,32)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사도 바오로는 남자와 여자의 혼인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유비로 선포하면서 ‘큰 신비’라 했다. 큰 신비에 함축된 여러 의미를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서 남자와 여자의 혼인(창세 1~2장 참조)에 대한 재조명이고,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때가 찰 때까지(갈라 4,4 참조) 숨겨 두신 혼인의 계획이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서 완성돼야 할 ‘한 몸’의 신비다. 혼인의 내적 의미인 이 세 가지가 혼인이 가야 할 길이고, 진리이며, 역동하는 생명, 곧 사랑의 길이다. 먼저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과 가장 오래된 혼인과의 관계다. 사도 바오로는 단순히 외적인 유사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 둘의 관계를 유비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서 그들의 혼인을 재조명하라는 이유는 부부가 나누는 사랑이 서로에게 구원성을 갖기 때문이다. 공적으로 동의하고 맺은 혼인의 계약은 존중과 신의 그리고 사랑의 충실을 담보로 한다. 그리고 변화 성숙의 여정을 거쳐 완성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쁨과 고통, 슬픔과 즐거움의 일들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는 길이고, 이 참여를 통해 혼인의 성사성이 갖는 본질을 드러낸다.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제시된 이유는 혼인이 영원한 신적 신비의 가시적 표징이 되는 성사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교회, 남편과 아내를 결합시키는 이 유비에 놀라움을 더하는 것이 있다. 티도 주름도 없는(에페 5,27 참조), 즉 추함도 늙음과 노쇠함도 없다는 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통해 사랑이 ‘영원한 청춘’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사랑을 영적인 아름다움의 표징으로 이해했다. 교회도 부부도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이 나누는 혼인적 사랑이 서로에게 구원적 사랑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사랑의 질서는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이고, 아가페적 사랑이 그 정점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눈물과 상처 그리고 좌절을 체험할 것이고, 후회와 간절함에도 포기하지 않는 과정을 통해 여물어진다. 즉 서로를 받아 내고 품는 과정을 통해 둘만의 새로운 시간들이 창조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먼저 고찰한 후 사도 바오로가 말한 신랑 신부의 관계를 바라본다면 혼인의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 이는 둘이 하나되기 전 원고독의 이중성(본성 그 자체로서 오는 것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과 완전한 주체성, 상호주체성의 재발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교리서는 말한다. 결국 혼인의 본질은 인간과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신비가 그 원천이며,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혼인적 사랑으로 시간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의 신비가 그 중심이다. 이러한 여정을 사랑의 신학 용어로 설명하면, 에로스적 특성이 넘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십자가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화해할 수 있는가이다. 에로스적 사랑의 특징은 자신에게 갇혀 있지 않다. 자신을 열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에 그의 존재가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바라봄과 자신들의 체험 사이에서 역동하는 사랑은 그들이 하느님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들에게 발견되고 드러나야 할 신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의 의미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과 ‘목숨을 바쳐 아내를 사랑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운 사랑일까? 감정에서 출발한 사랑이 영혼을 확장시키는 사랑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은 무엇일까? 사랑도 순종도 그 시작과 끝은 ‘나’가 아닌 ‘그리스도’가 근원이요 모델이다. 유비로 선포된 위의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감을 따기 위해선 먼저 감을 바라봐야 하듯, 주님의 선물을 먼저 바라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랑으로 너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혼인에 담긴 신비는 거룩함 그 자체를 관조할 때, 윤리적 도리나 삶을 짓누르는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는 여유를 얻게 한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라고 했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에페 5,23) 그리고 “남편 여러분, …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 5,25)에서 그것이 가능함을 명확히 드러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이유는 교회에 당신을 내어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내어준다는 말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혼인에 관계된 이 말씀들은 ‘처음’부터 혼인의 신적 제도를 지향하는 배우자적 사랑의 정신을 상기시킨 것이다. 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해 “한 몸”(창세 2,24; 에페 5,31)을 이루게 된 그 특별하고도 유일한 관계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에페 5,23) 이 유비는 다른 서간과 함께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남자의 머리”(1코린 11,3)를 연결해서 보면 몸은 아내와 동의어로 쓰였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15)에서 몸적-혼인적 교회론을 볼 수 있다. 예수는 머리이자 구원자이지만, 남편은 머리이나 구원자는 아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사도의 설명이 모순처럼 보이는 이유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5장 22절에 동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몸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완벽하고, 구원의 완성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순종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준 교회에 해당되지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상호 순종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순종의 근원은 존중이다. 교리서에서는 존중을 인간 사랑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자각하는 것으로 봤다. 한 가정을 구성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 안에서 꽃피우는 자각이다. 존중은 인간 사랑 그 자체의 뼈대가 된 하느님과의 관계에 우리 눈을 열어준다는 것, 즉 다른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모습을 알아보는 시각을 의미한다. 말씀의 육화에는 겸손이 전제되어 있듯 타자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하다. 인간의 인격성을 바라보고 그 인격성 앞에 겸손해야 한다. 즉 인간의 정체성과 그 고유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근원과 분리한다면 자기 자신의 내적 신비와 가까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서로의 몸은 경계선의 벽으로 남을 것이고 혼인의 위대한 신비를 자신들의 것으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겸손함은 사랑의 위대함에 자기 자신을 종속시킴을 뜻한다.”(카롤 보이티와(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랑과 책임」)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상호 순종의 의미

에페소 5장은 현시대에선 공감하기 쉽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순종을 점진적으로 전개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21절)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22절)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23절)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설정한 사도 바오로의 21절 말씀은 그 시대의 사회적 통념과는 달라 분명 논쟁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비롯됐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선물을 먼저 주셨고, 남자와 여자는 선재한 이 선물에 의해 상호 순종을 받아들이고, 그 순종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받아들인 순종의 근원은 그리스도이고, 타자를 그분의 인격 안에서 대하는 것을 말한다. 교리서는 순종을 존경의 차원에서 열었다(교리서 89과). 존경은 부부 관계의 바탕을 구성하는 골격이고, ‘선물’에 대한 믿음과 몸이 지닌 성사적 의미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리를 이해할 때 더욱 깊은 인식이 일어난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에는 두 가지 방향의 중요한 교차점이 나타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비로, 인간 구원을 위한 신적 계획의 표현으로 교회 안에서 실현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세례 받은 사람과 공동체들이 신적 계획에 동참하는 삶을 말한다(교리서 88과). 순종은 개인성이 무시된 무조건적 따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완전히 하나를 이룬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과 사랑의 완전한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발타사르는 순종을 내어줌의 힘(능력)이라 표현했다. 이렇듯 순종의 내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부부 상호 관계 안에 영적으로 현존하는 것으로, 두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한 나무에서 뻗어 나온 두 가지이고, 가지가 원천을 경외하듯이 서로에게 순종함을 말한다. 이는 세상의 부부들이 서로 배려하고 받아들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 삶의 모습에 그리스도 현존의 향기가 있고, 이 현존은 그들에게 선물 된 사랑을 보존하는 질서가 된다. 선물을 살아가는 본래적인 방법은 남성과 여성의 상호 균형적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원죄는 이 균형적 사랑을 파괴했고, 욕정에 사로잡혀 선물의 삶이 아닌 지배 구조로 타자를 바라보게 했다. 상호 순종은, 서로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유혹과 자신에게 기울어져 닫혀 버린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최종선을 바라볼 줄 아는 더 높은 호의적 사랑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상호 순종의 소명은 남성성 여성성의 서로 다름에서 상호 보완성을 드러낸다. 주님께서 나의 자유를 존중하시고, 자유의지가 동화되어 일어날 때까지 사랑과 은총으로 감싸고 기다리시듯, 상대에 대한 사랑이 수용성과 감수성으로 넓어질 때, 상호 순종의 빛은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한다. 혼인은 사랑하겠다는 의지로 출발하지만, 그 출발 안에는 그들의 과거도 함께 들어온 크나큰 사건이다. 남성성 여성성만 다른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이 달라, 사고하는 것과 그 외 많은 것이 다르다. 때론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그대 앞에서 느껴지는 외로움, 일치되지 않는 크고 작은 아픔들, 미움도 거리도 생긴다. 이때 있는 그대로 보아 주고 기다려 주는 것은 순종의 덕이고, 이 덕은 더 나은 변화를 위한 기폭제가 된다. 그래서 상호 순종은 복음적이며, 부부에 대한 하느님의 숨겨진 계획은 두 사람의 완성을 희망하게 된다. 만약 혼인이라는 배가 출항할 때, ‘상호 순종’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거센 파도가 있을 수 있는 바다에서도 떠내려가지 않는 지혜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그리스도교적 혼인

교리서 제5부(87과부터 113과)의 주제는 에페소 서간과 예언서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적 혼인이다. 땅에서 맺은 혼인의 근원과 최종목적지는 어디인지, 어떻게 할 때 순항할 수 있는지를 선포한 부분이다. 혼인은 공적 계약이고, 그들이 나누는 사랑의 노래가 두 인격의 본질을 이룬다. 수많은 아픔과 기쁨, 고통과 죽음을 헤쳐가면서 두 인격의 관계가 전 생애를 통해 서로를 성숙하게 하고 완성시킨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사람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고, 그분에 대한 신뢰가 성장할수록 두 사람의 관계도 성숙하기 때문이다. 만약 혼인이 문화와 인간학적으로 단순하게 축소된다면, 인류에게 주어진 혼인의 그 위대한 신비에 이르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여정이 될 것이다. 5부에서 중심축으로 다루고 있는 말씀은 에페소 서간 5장 22절부터 33절까지다. 사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익숙하고, 혼인미사에서 선포되는 독서 내용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신학적 의미가 몸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 유비(類比)가 에페소 서간을 통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남자와 여자의 혼인(창세 2,24 참조)이 지닌 참뜻을 반추하고 완성하는데, 그 신학적 의미가 사뭇 깊고도 놀랍다. 혼인은 창조 질서이며 은총의 질서에 속하고, 또한 구원의 성사다. 만약 혼인을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만 바라본다면, 평행선에 자신들을 두게 되어 세상이라는 파고를 헤쳐 나가기 어려울 수 있다. 그들이 평행선에서 다른 한 점을 발견할 때, 즉 그리스도와 관계를 둔 삼각형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혼인에 깃든 은총과 인간의 구원적 만남을 체험할 수 있다. 이는 교회가 혼인과 가정을 사목 중심에 두는 중요한 이유다.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친교가 신랑 그리스도가 신부 교회에 대한 사랑에 실제로 참여하는 방법이고, ‘영원히’와 연결돼 있기에 교회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목이다. 교리서 전체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제5부는 ‘한처음’(마태 19,4; 마르 10,6 참조)과 인간의 ‘마음’(마태 5,28 참조) 그리고 미래의 ‘부활’(마태 22,30; 마르 12,25; 루카 20,35 참조) 그 정점에 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에 관한 중요한 신학적 관점에 이르기 위해선 인간 몸에 관한 가르침의 연장선상에서 조명되고 해석돼야 한다. 에페소 서간은 다양성과 성의 다름에 기초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페 4,24)을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에페 5,1)으로 살아가길 초대했고, 그 절정에 남자와 여자의 혼인을 그리고 이 관계의 바탕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적 관계를 선포했다. 한처음부터 성의 다름은 단순히 그 자체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내어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넘어 타자와 만나고, 보이는 타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절대 타자에 이른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담고 있기에 혼인은 새로운 계약과 은총의 표지이며, 창조와 은총의 질서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나누는 혼인적 사랑에는 하느님 계획 안에 다른 최종 목적지가 내재해 있음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적 유비를 통해 혼인이 인간 구원을 위한 신적 계획의 표현이라고 에페소 서간은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의 계약적 의미를 아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 본성과 그 근원에 대한 질문을 갖게 하며, 윤리 조건의 근본 가운데 하나인 ‘혼인과 가정’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원인은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0-19 제3462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동정과 독신에 쓰여진 몸의 혼인성

교리서 4부는 몸의 의미를 계시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며 동정과 독신 성소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있다. “존재의 동일한 혼인적 의미를 토대로 남성 또는 여성인 몸으로서 전 생애 차원에서 인간을 혼인으로 의무 지우는 사랑이 형성될 수 있다면, 인간을 ‘하늘 나라를 위한’ 금욕으로 전 생애 차원에서 의무 지우는 사랑 또한 형성될 수 있습니다.”(80과 6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성 안에서 교회에 대한 혼인적 사랑(에페 5,22-23 참조)을 완성했음을 기억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천지 창조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18) 하신다. 여기에서 인간의 본성에 거룩함(聖性)과 아름다움(善性), 두 가지가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했기에 거룩하고(창세 1,26-27 참조), 내용이 조화롭고 그 질서가 존중됐기에(창세 1,28-30) 아름답다. 거룩함(聖性)과 아름다움(善性)이 씨앗처럼 뿌려졌고, 인간은 선물 받은 자유를 통해 자신의 행위들을 성장시키는 역사적 과정을 거쳐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 즉 인간이 무한을 향해 열려 있음을, 그 과정에 하느님도 인간도 역동적이라는 것이다. 죄를 범한 후에도 거두어 가지 않은 인간의 자유가 그것을 말한다. 처음 선, 그 자체가 근원이 되어 갈망이 태어나고 완성되는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복 선택하는 인간의 외적 반응은 자신의 내적(영혼)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동정과 독신의 성소가 ‘넘치는’ 사랑에서 출발하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인간 본성에서 가장 탁월하게 축복받은 부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부부애 신비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근거하며 ‘놀라운 사랑’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다. 그 이유는 본성, 성, 관능 이런 것들이 변화 성장을 통해 한 인격으로 성장 완성되는 질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변모를 돕기 위해 교황은 인격 안에서 동정 독신 소명이 ‘양성(Formation)’의 관점보다 정확히 ‘성숙화, 변화의 과정(transformation)’과 관련될 때 어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외로움은 그분을 만나는 고독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 몸’은 몸의 혼인적 의미를 회복할 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에서 당신 몸을 혼인적 선물로 교회에 내어놓았고, 부활한 몸으로 실제로 찾아와 나와 한 몸을 이뤘다.(성체성사) 인간 존엄성과 몸의 혼인적 의미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자신 안에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했고 자신의 전부를 건 특별한 선택이 바로 신적 사랑에 대한 응답 행위다. 그리고 혼인적 사랑의 행위인 성체성사의 신비 안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다. 그리스도와의 친교적 삶이 먼저여야 한다. 그런데 그분은 나의 어려움을 한순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칼’과 ‘불’을 주겠다 하신다.(마태 10,34, 루카 12,49 참조) 자신이 가는 길에 무절제하고 부정적인 욕망이 있으면 칼로 단호히 잘라야 하고, 아직 내 마음이 수동적 사랑으로 미적거리고 있다면 불이 타올라야 한다. 연소의 특징은 바닥에서 위로 오르고, 위로 오르면서 옆으로 전파된다. 내 가족처럼 달라붙어 편안하게 느끼는 것에서 과감히 일어서야 한다. 최고의 가치를 알 때, 그곳에 이르려는 열망이 활활 타오를 때, 그것은 가능하다. 성령의 불꽃이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신다.”(묵시 22,17)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20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주님의 일을 걱정함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하늘 나라를 위한 금욕이 하나의 포기라면 나에게 주어진 선물에서 무엇을 포기했는지 그것을 먼저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은 버린 것이 아니라 몸의 혼인적 의미와 내적으로 깊은 조화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즉 동정 독신의 소명 안에서 본능적인 ‘에로스와 양립할 수 있는가?’를 확인한 것이다. 동정 독신의 성소는 그리스도의 정감적 현존이라는 선물을 확인하고(「신학대전」, I-II, q. 108), 그분이 나에게 건너오고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L.M. Mendizabal) 그리스도의 거처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정감적 일치는 주님의 일을 걱정하는 모든 이를 아버지께 모아들이기 위해, 그분께 모든 지향을 맞추는 특별한 삶의 근간이 된다. 받은 선물로 충만한 동정 독신 생활은 ‘에로스’의 최종적 의미, 곧 종말에 살게 될 삶을 역사적 시간 안에서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성’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를 넘어서길 요구한다. 사도 바오로는 혼인을 ‘잘하는 것’으로, 동정 독신 생활을 ‘더 잘하는 것’으로 말한다. 동정 독신 생활을 바라보는 바오로의 시각은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둔 권고로 이어진다. 그리스도와의 사랑이 인격적 관계로 그 어떤 것에서도 방해받거나 굴레를 씌우지 않으며, 오직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다(1코린 7,35 참조). ‘섬기게 하려는’, 즉 금욕 동정의 이유는 갈린 마음 없이 오직 한 가지, 곧 ‘주님의 일’을 걱정하기 위해서다.(1코린 7,32 참조) ‘주님의 일’은 ‘온 세상을 위한 원고독’을 뜻한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0,26)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는 일에 사랑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기 위해서다. 인간과 하느님의 인격적 관계, 곧 내적 친밀감으로 하나를 이루는 관계다. 그리고 ‘하늘 나라를 위해’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의식적 선택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창세 2,18)”, 곧 하느님 앞에서의 원고독이 가져오는 ‘아픔’ 안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통해 원고독의 아픔은 하느님만이 궁극적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 분임을 갈망하고 증거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동정은 불임이 아니라 영적 부모성을 갖는 것이라 했다. 여기에서 ‘영적’이라는 말은 성령 안에서 몸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독신 성소를 ‘양성(養性)’의 문제일 뿐 아니라 ‘변화하고 성숙하는 과정’이라 말하는 이유다. 어느 성소든 성의 참된 의미를 알고 삶에 녹여낼 수 있다면 왜곡된 성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성에 든 선(善)의 내재된 의미를 바르게 알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서두에서 “선(善)은 모두가 갈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완전함을 갈망할 때 그 선 자체를 갈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몸 자체가 그런 지향을 담고 있기에 가능하다.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이어가시면서 반복적으로 ‘보시니 좋았다’ 하셨고, 사람이 죄를 범한 후에도 그것을 나쁘다 하지 않으셨다. 그 안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욕망 중 특히 성욕과 식욕을 볼 수 있다. 그 욕망들에 의해 역사는 멈추지 않았고, 구원의 역사 또한 이어졌다. 욕망 안에 든 선을 보고 갈망할 때,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한 인격으로 완성되는 질서에 놓이게 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금욕의 ‘우위성’, 혼인에 대한 평가 아니다

신앙 안에서 동정 독신은 근본적으로 살을 취한 말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문제로 수렴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으며, 특정되고 구체적인 특성을 지닌다. 성령 안에서 체험되며, 그 체험은 자신 밖으로 분출되어 타자에게 나아가고, 이때 전파되는 형식은 인격적이다. 동정 독신 성소는 자발적이고 초자연적인 특징이 강하게 부여되지만, 혼인 성소나 세상에서 독신자로 살아가는 이들과 계급이나 등급, 단계로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의 본성인 ‘혼인성’이 결혼한 이에게는 자녀 출산으로 이어지고 동정 독신을 선택한 이에게는 영적 출산으로 이어질 때, 그 성소의 빛이 사람과 세상에 초자연적인 특징, 즉 하늘나라를 위한 그리스도와의 혼인 관계에 특별함을 드러나게 한다. 그러므로 성소 자체가 우위에 있지 않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동정 또는 독신은 혼인의 존엄성을 위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전제하고 강화합니다. 혼인과 동정 또는 독신은 하느님과 사람들의 계약의 신비를 표현하고 살아가는 두 가지 방법입니다. 혼인이 존중되지 않으면, 성화된 동정이나 독신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성(性)이 창조주가 주신 중대한 가치로 인정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성의 포기도 의미를 상실합니다.”(「가정 공동체」 16항) 동정 독신은 인간 본성에서 가장 탁월하게 축복받은 부분에 그 근본을 두고 금욕을 받아들인다. 이는 동정 독신이 인간의 본성적 특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초월적 의미를 탁월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소의 특징은 넘치는 사랑에서 기인했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으로 교환된다. 본성을 파괴하거나 보류한 것도 아니며, 부부 사랑의 신비에 ‘반대되는’ 것도 아니다. 초자연적 사랑의 모습이 자연적 모습으로, 자신의 지향에 의해 변화·성숙의 여정을 거쳐 그 완성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리서 본문에서 초기 양성과 지속적인 양성을 강조했다. 동정 독신 서원을 한 후에도 자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특징은 없어지지 않으며 성적 욕망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소로 지키는 독신에서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단순히 인간적 어려움에 머물지 않고, 성의 본질적 의미를 알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성의 목표(목적), 일치(한몸)를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종말론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고, ‘하늘나라’ 증거라는 적극적 의미이기도 하다. 만약 이러한 동기와 지향이 희미해지면 풍랑에 휘둘린다. 욕구에 든 참된 의미를 안다면, 출구도 정확히 찾을 수 있다. 욕망은 인간성의 본질적 표지이고 우리가 하느님께 속한다는 표지다. 뿌리를 뽑거나 무감각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모든 대상을 하느님과의 참된 관계에 맞추어 질서 잡는 일이 중요하다. 이는 우리 마음이 진정한 자유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또 어둠에 빛을 비추어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앎도 동반되어야 한다. 자유를 얻으면 강해지고 빛을 받으면 생명을 얻어 성장, 변화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식욕과 성욕이라는 욕구를 허락하셨는가? 독신 동정 서원을 했음에도 왜 성적 본능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가?’ 배고픔과 성적 충동은 단지 충족해야 할 욕구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를 더욱 위대하고 충만(행복)한 삶, 거룩한 삶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원일치를 갈망하는 원고독을 온몸으로 살고, 십자가와 부활이 동정성의 정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9-21 제3459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인간 영의 초자연적인 풍요로움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금욕을 받아들인 이 성소는 몸의 궁극적 완성을 바라본다. 이는 ‘몸 신학’의 핵심적 의미로 몸의 끝은 죽음을 건너 영광스럽게 빛나게 됨을 말한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10,5)라는 말씀을 지금 이 땅에서, 구원 사업의 역동적 여정에서, 그리스도께서 바라셨던 것처럼, 이미 그리고 완성을 희망하는 긴장 안에서 부활된 자신의 몸을 통해 증거한다. “복음적 권고의 서원은 교회의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의 의무를 꾸준히 이행하도록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고 또 이끌어야 할 표지로 드러난다. 이미 이 세상에 있는 천상 보화를 모든 신자에게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얻은 새롭고 영원한 생명의 증거를 드러내며, 미래의 부활과 하늘 나라의 영광을 예고해 준다.”(교회헌장⸥ 44항) 이미 시작한 부활의 인생이요, 온전히 완성될 미래를 담아내는 그 몸은 ‘하늘나라를 위한’ 금욕과 성령에 초대된 인간 영과의 초자연적인 충만의 관계를 체험하고 또 증거한다. 교회는 마리아와 요셉의 동정성과 충만하게 작용한 성령과의 관계를 긴 역사 안에서 설명해 왔다. 마리아와 요셉의 위대함은 단순히 동정성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영이 그들 안에 역동하고 열매 맺도록 자신을 내어놓은 데 있다. 구원의 신비인 말씀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신비적 동정과 육체적 동정을 온몸으로 살고 드러낸 것이다. 육체적 동정 안에 신비적 동정이 서로 순환하며 성장하고 세상에 구원을 내어줄 준비를 한 것이다. 금욕은 단순히 ‘정결하게 사는 것’에 묶이지 않는다. 왜, 무엇을 위해, 어떤 의미로 자신이 응답한 삶을 자신의 몸으로 증거하고, 무엇을 열매 맺고자 하는가에 대한 지향을 분명히 해야 자신의 서원이 갖는 몸의 예외적 가치를 힘 있게 증거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 드림으로써 그들 안에 일어난 성령의 역동은 성자 안에서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 됐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경탄할 신비가 희미하지만, 위격들 안에서 보인 일치의 은총은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임으로써 나오는 영적 열매의 절대적 완성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금욕을 받아들이는 남자와 여자는 이처럼 넘쳐흐르는 성령의 열매에 동참하는 것이라 말한다. 결국 그들의 삶은 ‘지상 삶의 실재에서의 정결 성소’와 ‘하늘나라를 위한 금욕’으로 인간 영의 초자연적인 풍요로움 간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드러낸다. 자발적이며 초자연적인 동정의 친교를 통해 인격적 자기 증여의 충만함과 인격 간의 상호 주체적 친교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특징을 지녔다. ‘하늘나라를 위해’ 금욕을 선택하는 행위는 성령께 자신의 영을 순응시키면서 초자연적인 목적을 바라보는 일이다. 처음 시작과 최종 목적지 간의 거리는 순간이면서도 참으로 멀다. 마리아와 요셉도 때론 선명하게 들리고 볼 수 있었지만, 더 많은 시간은 숨겨져 있어 때가 올 때까지 마음에 간직했다고 전한다. 그리스도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찾는 인생이다. 금욕을 선택했더라도 ‘하늘나라를 위한’ 금욕이 아니면 교회가 말하는 동정 독신은 아니다. 동정의 가치는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에서 특별한 역할을 찾아야 한다. 하느님과 혼인한 자기를 내어줌은 하느님과의 영원한 결합을 지향하는 것이다. 몸을 통한 자유롭고 충만한 자기실현이 신성시되는 이 시대에, 이 삶을 선택하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질문이 되기를 소원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9-14 제3458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하늘 나라를 위한 동정과 독신

마음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집으로 새로움을 낳는 처소다. 신약성경에서는 ‘마음’을 인간 본연의 삶의 근본이자 원리로 이해했다. 선재한 은총은 마음의 내적 동력에 의해 실현되고, 희망과 노력은 삶을 선의 충만으로 이끈다. 예수께서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심과 한처음 상태의 회복을 다룬 ‘마음의 구원’(교리서 2부)편이 다소 길었던 이유다. 오늘부터 만나게 될 주제는 그리스도의 말씀(마태 19,10-12 참조)에 바탕을 둔 제4부(73-86과) ‘하늘나라를 위한 동정과 독신’에 대한 이해다. 이혼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혼인은 하느님이 제정하셨으므로 부부의 근원은 한처음에서 찾아야 한다(마태 19,1-9 참조)는 말씀에 이어지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제자 중 한 명이 혼인의 무게를 너무 크게 느껴 넋두리처럼 한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에 대해 응답하신다.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새로운 성소의 지평을 당신께서 연 것이다. 우리가 첫 번째로 눈여겨 볼 점은 이 부분의 배치다. 성경에서는 ‘혼인’ 이야기 다음에, 교리서에서는 ‘육의 부활’ 다음에 자리한다. 배치 순서에서 새로운 신분의 상태가 암시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교리서의 폴란드 원전은 3부 1이 ‘육의 부활’, 3부 2가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이다. 즉 바리사이들과의 대화에서 부부의 근원은 한처음이지만, 하늘나라를 위한 동정과 독신의 삶은 미래에 완성될 그러나 이미 시작한 성소로 몸의 종말론적인 예고요 표징임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것이다. 몸의 근원과 몸의 궁극적 완성이라는 두 말뚝을 박고, 금욕 생활에서 ‘하늘나라 때문에’라는 지향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두 번째로는 이 성소가 하느님을 향한 배타적 사랑 즉 혼인적 사랑이며 신비적 동정인 까닭을 육체적 동정과의 밀접한 관계로 암시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예고요 표징이지만, 사두가이들과의 부활 논쟁 후에 언급되지 않고, 바리사이들과의 혼인 말씀 후에 언급된 것이다. 즉 세상 안에서 ‘지금’ 하는 응답이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바는 최종 목적지다. 그들이 지향하는 지복직관을 오늘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 비추는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즉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소는 단순히 독신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혼인한 동정의 삶을 독신의 형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격이 하느님께 속한다는 사실은 신비적 동정에 의해 강조되고, 육체적 동정으로 표현된다. 사도직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나 하늘나라 안에서 금욕 생활도 아닌,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금욕 생활을 받아들인 이들이다. 제자 중 한 명이 말한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의 관점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의 고유한 성소, 곧 사랑을 위해 다른 한 성소를 포기하는 길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동정과 독신은 몸이 지닌 혼인성의 의미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의 진리에 담긴 자기 증여와 충만(행복)을 체험할 때 종말론적 삶은 그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이 성소는 결혼의 지상적 표지 안에서 혼인성이 아닌, 임박한 동정성의 신비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혼인성을 살라는 초대요, 권고다. 책임질 것이 없는 독신자처럼 스스로를 생각한다면 자신의 신분과는 거리가 멀다. 내 집에 내가 없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예술 작품의 ‘주제’로서 사람의 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마음의 구원’에 대해 약 1년간 말씀하셨다. 마지막 주제는 예술 작품에서 표현되는 알몸에 관한 놀랍고도 균형 잡힌 고찰이다. 인간을 주제로 하는 문학, 미술, 음악, 춤 등은 몸을 매개로 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인간을 하나의 대상으로, 벗긴 몸으로 소모품화한다면, 그것은 ‘외설’, 즉 외설 문학, 외설 영상이 된다. 우리는 성지순례나 외국을 여행할 때 알몸을 표현한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나는데, 관능을 초월한 아름다움에 매우 놀란다. 작품을 통해 인간의 인격적 경이로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 예술, 특히 그리스 문화에서 인간의 벌거벗은 몸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지닌 존엄성과 아름다움, 그 자체로 인간-인격의 신비로운 승화의 요소를 보게 한다. 인생의 전 과정에서 체험되는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쾌락과 사랑, 종교, 죽음, 자유 등은 그 주제 의식과 표현 기법에 따라 예술과 기술 사이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렇듯 예술은 몸 신학에서 말하는 생명의 몸을 예술가의 보이지 않는 영역의 세계를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외설은 그렇지 않다. 외설은 마음 안에서 몸의 의미와 가치가 변형되고 파괴된 것으로 욕정을 일으키려는 구체적인 시도다. 마음의 깨끗함에서 지향이 변질된 것이고, 인격의 존엄성과는 반대의 길로 간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드러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다. 외설은 인간 인격을 은폐한다. 인간은 벗기거나 벗은 목적에 따라 대상화된다. 또 무작위로 복사, 전파할 수 있다. 외설의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적 특성, 인간 몸의 표현 능력 등을 마음 안에서 왜곡시킨 것이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이미지를 소비하고 상품화한 것이다. 예술가의 사유와 철학이 깃든 각 작품은 관람자들의 정신과 생각에 스며들어 공감을 얻게 되고, 은유적인 표현들은 종교적 이미지와 연결돼 관람자의 영혼의 창을 두드린다. 하지만 창작자와 관람자의 상상이 온전히 같을 수는 없기에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인간은 감수성이 매우 발달한 존재다. 벌거벗은 몸을 대할 때 부끄러움의 한계를 넘어선다면, 몸의 내밀함의 권리가 침해당함을 느낀다면, 선물과 상호 자기 증여의 법칙이 침해당한다면, 벌거벗음과 연결된 인격적 감수성이 침해당했다고 느낀다면 외설로 비난받을 수 있다. 몸을 묘사하는 예술 행위에는 특별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 이유는 몸이 인격의 가장 내밀한 선물을 드러내고, 알몸에 대한 묘사가 인간 신비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인격을 비하할 수도,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를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는 양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존재로서 철학자요 신학자요 예술가다. 삶을 해석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사람됨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문화예술 전문가는 예술 작품의 대상이 갖는 충만한 가치의 진리를 인식해야 한다. 또 예술 작품은 사회적 소통에 큰 영향력을 미치므로 윤리적인 면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이 벌거벗은 몸이 갖는 윤리적 질서가 가리키는 몸의 근원적인 의미에서 벗어난 형태가 된다면, 이는 일종의 일탈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심을 가져온다. 예술은 우리의 삶과 별개로 먼 곳에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 삶 속에 들어온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술은 우리의 몸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예술을 ‘영혼의 노래요 춤’이라 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충만한 생명의 표상이 되어야 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8-31 제3456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몸의 교육학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몸 신학’을 교육학이라 정의하며(59과 2항) ‘공부(Studio)’라는 단어를 13회 이상 사용했다. 그리스도 말씀에 바탕을 둔 분석과 묵상을 인간 교육과 자기 교육에 가장 적합한 ‘몸 교육학’ 관점으로 접근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만, 시편에서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의 빛을 비추소서”(4,7)라고 노래하듯이, 하느님 시선으로 나를 비춰야만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근원적으로 주어진 몸의 아름다움에 담긴 진리의 빛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했다. 아름다움에 취해, 그에 합당한 생각과 행동으로 자신의 인생을 베틀에서 천을 짜듯 한 줄 한 줄 빚기를 바라셨다. 몸은 세상에 있으면서도 초월 세계를 그리워하고 또 증거한다. 순간순간 열린 마음으로 성령과 함께 자신의 구원 역사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즉 내가 그분 안에 완전히 담기게 될 때까지, 몸은 쉼 없는 사랑의 역동성이 내재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산업이 분업화되듯 인간의 몸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각의 기능 혹은 역할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 바탕에는 인간을 육체적인 면과 그 안에 있는 영적인 면으로 분리하여 몸을 대상으로 보는 인식이 자리한다. ‘몸 신학’은 단순히 교리가 아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존재하는 인간에 관한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몸 교육학’이다. 인간 몸은 “인격의 표징”, 즉 그의 영혼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몸에 대한 통합적 진리를 알 때, 어느 한쪽만을 향한 선택을 하지 않게 된다. 오늘날 이런 교육은 절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몸을 균형 있게 받아들일 때, 세상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빛 속에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빛을 받아 자신을 통과시킬 때 문을 활짝 열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고, 세상은 그 빛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 본성에 합당한 세 가지 지복, 육화된 지복(인간은 순수한 영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이요, 신적 지복(하느님과 함께하는 무한에 대한 갈망)이며 공동체적 지복(함께 하는 세상을 만든다)이 된다. 몸 신학의 교육학을 ‘몸의 영성’ 관점에서 이해할 때 인격 간의 친교 안에서 참된 ‘질료’가 되고, 영적 성숙을 통해 자신의 몸에서 혼인적 속성을 발견하고 그 삶을 실현한다. 생물학적 지식은 인간 인격에 합당한 영적 성숙과 함께 할 때 그 의미를 발견하지만, 그 반대일 때는 하나의 물질이며 조작 대상으로 취급되는 부끄러운 소식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듣는다.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있는 현 상황을 바라보고, 무엇보다 인격인 인간에 대한 앎이 선행되어야 한다. 포도밭은 그리스도 안에 인격적으로 접목된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한다.(요한 15,1~17 참조) 포도나무는 가지 하나하나에 자신의 수액을 줌으로써 생명을 나눈다. 만약 수액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이제 그분은 내가 살아가는 데 내재된 원리가 됐다. 종이 아니라 벗이고, 자녀이기에 강제성은 없다. 맏형인 그분이 자신을 내어놓고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인 그 사랑에 물들어 간다. 그리고 완성을 향한 목마름은 지향을 더욱 견고히 하며 변화의 길을 걷는다. 이렇듯 몸 신학은 몸의 교육학일 수밖에 없고, 그에 맞는 질서와 사랑의 표현들이 최종 목적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 신학은 몸을 계기로 삼는 인간학이요, 신학의 새로운 체계를 호소하는 지점이다. 리옹의 이레네오가 묘사하듯 먼지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하느님으로, 하느님의 모상성에 담긴 신비요 계획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8-24 제3455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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