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욕망, 원초적 알몸이 지닌 의미의 근본적 변화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인간에 관해 계시된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세 가지 형태를 육의 욕망, 눈의 욕망,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이라 했다.(2,16-17 참조) 이 욕망들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 즉 욕망 그 자체보다 욕망의 근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밝히며 인간에 관한 진리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그리고 사람이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2,23) 외치며 서로를 보았던 신적 시야가 ‘음욕을 품고’ 바라봄으로써 그를 소유 혹은 사용하려는 대상으로 변화된 것이다. 먼저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자신들의 실존 뿌리인 알몸을 부정하고 숨었지만 그분의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그분을 부정한다 해도 나는 그분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창조의 질서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알몸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부끄러움과 연관되는데, 사람이 그 의미를 어떻게 적용하는지 그 변화를 살펴보자.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25)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3,7)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3,10) 부끄러움이 두려움으로 변화했다. 존재 자체를 뒤흔든 ‘두려움’, 감정으로 느낀 이 두려움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것을 덮으려 했을까? “타락의 증상인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부분은 이 구절이 들어 있는 문맥 안에서 숙고되어야 하고, 부끄러움은 그 순간 가장 심오한 차원을 건드립니다.”(27과 1항) 하느님의 모상성과 유사성인 인간 본성은 선물로서 스스로 내어줌인데 그것을 덮겠다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없는 내가 되겠다는 것이고, 나 또한 너에게 선물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먼저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 물었다. ‘무엇을 했느냐?’고 묻지 않고, ‘너’라는 존재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알몸이 두려워 숨었다고 말하지만 따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그 사실을 두려움으로 덮어 놓은 부끄러움, 그의 잘못을 일깨운다. 사람의 대답에서 하느님에 대한 앎의 결핍이 드러남을 묵상할 수 있다. 놀랍게도 하느님에 대한 앎이 부족하면 자신에 대한 앎도 부족하고, 앎에 대한 결핍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결핍으로 이어진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에서 그 구체성만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의 정확함이 우리를 놀랍게 한다. 육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인간 감정의 표현과 깊이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성과 유사성을 지닌 인간 몸의 속성을 거부한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선물로 나에게 왔고, 그 선물을 다시 내어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관계의 단절은 곧 하느님과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앎의 결핍이 인간 정신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욕망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깊이 와닿는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6-19) 내어주는 사랑의 관계를 떠나면 남을 탓하여 자신을 지키려 하고, 사랑의 관계로 돌아갈 때는 관계 속의 ‘너’에게 참회와 고백을 한다. 그래서 먼지로 돌아가라는 말씀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한 선상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20 제3438호 23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시다

“구약의 여러 책들에 나오는 결의론은 외적인 기준들에 따라 그러한 ‘몸의 행위’를 구성했던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집착하였고, …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해’ 비롯된 다양한 타협들 탓에 율법 제정자가 원하셨던 계명의 본래 의미가 변질되었습니다.”(24과 4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2부의 주제, 인간 몸의 존재론적 진리와 그에 따른 윤리적 의미를 규범적 성격으로 풀기 위해 창세기 3장으로 가야 된다. 태초의 사람들이 선악과를 먹은 후 하느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힌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ᅠ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3,22) 이제 사람에겐 스스로 선과 악을 식별하는 인식과 지성의 능력이 있음을, 그리고 그에 따른 선택 또한 인간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하느님은 자기 계시(“우리 가운데 하나처럼”)를 복수로 일컫고, 이제 사람도 절대 진리,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22절의 후반부가 선명해진다. 그런 상태에서 그들이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하면서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셨다. 이제 인간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원상태로 회복해야 한다는 과제가 인간 편에 주어졌다. 사람이 알지 못했던 부분을 알게 되어 한처음의 상태와는 달라졌고, 그 달라진 상태의 원회복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비추어 그의 내면과 마음에서 자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마음은 인간 몸의 의미에 대한 감각과 이 감각의 질서와 연관된 인간성의 차원입니다.”(25과 2항) 인간이 ‘그의 내면과 마음에서 자신을 되찾을 수 있는’ 이유는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자신 안에 있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느님의 거처, 곧 선의 거처이기에 그리스도는 단죄가 아니라 회복해야 하기에 호소를 한 것이다. 더 나은 영적 삶, 그리고 완성을 원하는 삶이라면, 자신이 겪은 일과 결과에 몰입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인 ‘마음’을 살펴야 한다. 「티베트의 지혜」에서는 “마음을 안쪽으로 되돌려 마음의 본성에서 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과 행위는 모두 마음을 통해 가능하다고 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짐작하고, 또 이해하는 통로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너무나 예민하고 오묘한 것이어서 쉽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는데, 이는 자신을 망가뜨리는 길입니다”고 했다. 장자는 인간의 마음은 절대적 자유를 원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문제는 결국 인격 의식과 정신적 자유의 문제로 돌아가고, 마음의 절대적 자유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짧은 말씀 안에 간직된 세 가지 요소,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의 의미, 그리고 ‘마음으로 범하는 간음’에 대해 우리는 차근차근 묵상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인간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유를 거두지 않으시고, 앎에 의한 그들의 선택이 땅에 묶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마음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마음 교육은 인격적인 본성을 찾도록 도와주고, 세상의 어떤 욕망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내적 힘을 갖게 한다. 그럴 때 많은 배움들은 자신만이 살겠다는 바벨탑으로 변하지 않고, 인류에게 나누는 능력이 된다. 앎과 나눔은 한 선상에 있는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13 제3437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마음의 구원 - 참된 자유

지금까지 우리는 교리서 1부 ‘한처음’(1~23과)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1부는 존재, 즉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고, 오늘부터 펼치게 될 2부는 ‘마음의 구원’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이 내적 인간, 즉 마음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바라보게 한다. 마음의 구원편은 무려 1년 1개월(1980년 4월 16일~1981년 5월 6일) 동안 교황의 수요 교리로 계속됐고(특별한 전례 시기는 제외), 그 분량도 40과(24~63과)에 이르는 대단원이다. 2부의 중심 말씀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이다. 교황은 이 말씀에서 ‘몸 신학’의 핵심적 의미를 찾았고, 마음이 그 모든 것의 출발이요 중심이라 보았다. 한 인간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행위들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움직인 것이기에 외적으로 드러난 행위를 판단하기 전에 내적으로 어떤 상태였는지 먼저 살피라는 뜻이다. 즉 왜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는지, 무엇에 묶여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 참된 자유, 곧 한처음 상태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회복하여 한처음 상태에 놓이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고, 그는 하느님을 뵙는 참된 행복에 머문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말론적 의미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나는 부활의 삶이다. 1부에서 다루었던 바리사이들과의 이혼에 관한 논쟁(마태 19장, 마르 10장)처럼, 마태오 5장 27절과 28절의 말씀도 창세기 첫 장까지 거슬러 올라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도 다른 말씀과 마찬가지로 규범적 성격을 뚜렷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24과 2항)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가 갖는 정황도 그 의미가 얼마나 폭 넓은지 알 수 있을 때, 제6계명인 ‘간음하지 마라’는 복음적 의미에서의 ‘이해’와 ‘완성’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만나게 된다. 인간 행위의 윤리 기준을 외적으로만 보고 판단하던 것을 이제 내적으로, 즉 마음에서 다루는 에토스의 중요한 전환점을 새롭게 제시했다. 또 규범적 성격을 띤 이 복음 구절에 대해 인간적 해석은 하지 말 것을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2부에서 다루는 중심 성경 말씀의 본질에 이르려면, 간음의 범위를 다시 보아야 한다. 구약시대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혼인 관계로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떠나 세상 것을 쫓을 때 간음이라 표현했다. 신약시대는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이는 율법이 아니라 영에 따라 가능한 것으로, 그 영의 자리가 바로 마음으로 제시되었다. 세례자 요한은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면서 자신을 율법에 비추어 말했다. 외적인 율법의 영향은 작아지고 복음은 내면에서부터 커져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문제의 본질, 즉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원하고 있다. 이는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간학적인 이유에서도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긴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몸의 삼중성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까지가 자연적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열고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자아 초월적인 면을 지닌 양면성의 존재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인 가치에서 끊임없이 초월적 가치를 선택하고 그 완성을 바라는 이들이다. 이 양면성은 자신의 전 생애를 자녀적 몸, 혼인적 몸, 부모적 몸으로 변화시킨다. 이를 몸의 삼중성이라 하는데, 단순히 육체적이고 외적인 신분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적이고 영적인 변화에서도 같은 질서이다. 삼중성의 특징을 어릴 때 갖고 놀던 팽이에 비유한다면, 팽이의 아래 뾰족한 부분은 자녀적 몸, 좌측 상단은 혼인적 몸, 우측 상단은 부모적 몸이다. 팽이가 잘 돌고 있을 때는 땅에 닿아 있는 심지 부분이 양쪽 두 축과 균형을 이룰 때다. 삼중성은 한 신분이 정리된 후 다음 신분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신분의 상태는 모두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데, 부모에 의해 자녀가 되고, 너를 만나 남편/아내가 되며, 자녀를 만나 부모가 된다. 자녀적 몸은 남편과 아내의 친교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로 한 존재의 근본이요 알파이다. 자녀적 몸은 부모와 분리될 수 없고, 성장 또한 부모와 함께하는 가운데 부모됨, 가족됨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고, 내재해 있는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로 부르는 은총, 곧 자녀의 신분을 얻는다. 혼인적 몸이란 아낌없이 그에게 주고 또 전부를 받는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나의 관계를 혼인적으로 표현했다. 혼인적 몸에서 부모적 몸으로 넘어가지만,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점은 부모이기 전에 서로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유산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다. 부부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사랑은 자녀의 성장에 측량할 수 없는 큰 자양분이요 힘이며, 생명을 지을 토대이기 때문이다. 부모적 몸은 아브라함과 사라에서 그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창세 22장 참조) 사라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본문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고, “아침 일찍 일어나”(3절) 준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를 보며 계획했던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좌절도 맛보았을 것이다. 산을 오르며, 이사악이 번제물로 바칠 양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7절), 아브라함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는 응답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모습은 자녀가 아버지를 넘어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돼야 함을 뜻한다. 오래 묵상해야 할 부분이다. 부모됨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 여정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부모는 자녀의 근원으로서 또 다른 알파이지만 자녀의 오메가가 아님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부모와 자녀는 존재가 함께 확장됨을.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넘어선다.” 파스칼의 말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사랑’과 ‘사랑하다’의 관계

교리서 제16과 “일관된 증여가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1항), “행복은 사랑 안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2항), “사람은 신적 증여의 가장 고귀한 표현으로 가시적 세상에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 안에 선물의 내적 차원을 가지고 (…) 그의 하느님과 닮은 고유한 모습을 가지고 세상 안으로 들어갑니다”(3항)는 사랑의 신학적 논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명사로 한처음의 ‘숨’, 세례 때의 성령,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내재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원천이며 근원적인 이 사랑을 철학에서는 에로스로 표현한다. 교회 문헌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항)이라 에로스를 말한다. 인간 몸은 육체이고 영혼이다. 육체가 영혼을 지니고, 영혼이 육체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긴 세월 이 둘을 분리했고, 사랑 또한 에로스와 아가페로 나누어 서로 만날 수 없는 지점에 있는 사랑인 듯 말했다. 그러나 에로스는 인간 육체에 그 뿌리를 둔 성적 충동 그 이상이며, 인간이 자신의 삶에 열정적으로 집중하게 하고, 욕망과 희열, 감사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주는 선물이요, 생기를 주는 힘이다. “사랑은 영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이다.(「신학대전」 I-9) ‘몸 신학’은 에로스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또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설명한 놀라운 가르침이다. 관능적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는 긴 세월 교회 안에서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그 놀라운 사랑의 얼굴을 찾았다. 많은 성인성녀들은 자신의 사랑을 에로스라 고백했고, 또 어떤 성인은 자신의 에로스는 예수 그리스도라 했다. 하느님은 성을 인격과 결합시켰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형태를 말하셨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로스를 덜 열정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인격적이게 만들어 그 정상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에로스가 지닌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 창조주께 있음을 받아들일 때, 모든 은총의 원천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에로스와 은총이 동반 관계에 있음을 알고 욕망들을 정화하여 타자에게 향하게 된다. 이때 ‘사랑’은 나의 지향과 선택에 의해 행위로 재창조되는 ‘사랑하다’가 된다. “성은 거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육체성이 지닌 신비한 힘, 그 이상의 것입니다.”(2항) 어느 성소의 길이든, 에로스적 갈망 안에서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행위는 구원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재하던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백성이 사랑을 잠시 잊은 것이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떼를 쓰고, 찬미가에서 그 사랑을 노래한다. 묵시록에서는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2,4)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처음 받은 그 사랑을 버리고 사랑을 다르게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를 이루는 신앙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여기에 머문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신 그 구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의 답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때문”(「신학대전」, Ⅱ-Ⅱ, q.23)이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열매는 행복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몸에 관한 앎, 세가지

지금까지 우리는 창세기 2장 하느님의 인간 창조를 살폈으니, 오늘은 1장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인간에 관한 앎을 더해보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ᅠ사람을ᅠ만들자.’”(창세 1,26) 하느님은 당신 계시에서 혼자가 아닌 관계를 드러내는 '우리'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해 사람이 당신들의 ‘모상’(imago)이며 또한 ‘유사함’(similitudo)이라고 명료하게 말했다. ‘모상’은 그 사람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인간 존엄성의 존재론적 뿌리가 당신에게 있음을, ‘유사함’은 인간이 완전하신 하느님과 다르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그래서 완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마태 5,48; 루카 6,36) 인간에 역동적 공간이 있음을 말한다.(로마 3,26: 8,30 참조) 완전함을 향해 인간이 나아가야 할 이 역동적 실현은 하느님 ‘모상’인 몸에 관한 이해와 속성 그리고 몸의 언어에 담겨있다. 이를 질문으로 표현하면, ‘나는 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몸은 어떤 속성을 지녔는가? 몸은 어떤 언어를 표현하는가?’이다. 첫째, 몸은 선물이다. 나는 선택과 자유 없이 남자/여자로 태어났고, 또 그 성(남성성/여성성) 그대로 거두어진다. 한 번은 세상 안으로, 또 한 번은 세상 밖으로의 불림이다. 그 부름을 살아가는 역사적 인간은 존재 자체가 선물이며 형이상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고,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갖는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내 눈이나 세상의 눈보다, 나를 존재케 하신 분의 눈에 더 아름답고 더 가치가 있으며,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생의 목적이 있음을 안다. 둘째, 몸은 혼인적 속성을 지녔다. 혼인적 속성을 살 것이지 아닌지는 자신의 선택과 자유 안에 있다. 인간 몸이 육체성만 있지 않듯이 혼인적 속성 또한 결혼을 해서 나누는 성적인 육체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몸이 지닌 내적인 질서, 곧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혼인한 이들은 부부 결합 방식으로 전부를 주고 전부를 받는 관계이지만, 동정이나 봉헌자들은 지향에 의해 생식성의 사용을 배제한 차원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실현한다. 이는 하느님이 성자를 통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셨듯이 인간 또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삶의 형태이다. 만약 몸을 ‘선물’의 논리로 이해하고 행한다면, 내어줌은 자기 탈출, 자기 초월로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갈망의 놀라운 실현이다. 셋째, 몸은 사랑의 언어를 드러낸다. 눈짓, 손짓, 미소, 말 등으로 드러나는 이 언어는 자신의 감정을 타자에게 전달하는 인격의 표현 수단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우리”(창세 1,26), 즉 세 위격은 가장 완전하게 자신의 전부를 주고 받아들인다. 다른 분을 위해, 다른 분과 함께, 다른 분 안에 현존하는 사랑의 관계이다. 결국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와 함께, 누구를 향해’ 살아갈 때, 처음부터 자신의 몸에 쓰여진 그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인간에 대한 정의는 혼자가 아닌 관계에서 찾게 되고, 타자는 ‘나’를 보완하는 사람이 아닌 또 다른 나로 나의 책임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망을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정점에 있다. 그분의 몸(성체)은 자신을 선물로, 자신의 신부와 하나 되기를 바라는 혼인적 속성으로, 사랑의 언어로 나에게 오는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임이 곧 내어줌이 되고, 이 관계가 세상 안에서 변화되면서 몸이 성사요 거룩함의 주체임을 드러내는 여정이 된다. 몸의 길이 곧 사랑의 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몸 신학 교리]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인간

고독-일치-순수는 인간 본성의 근본 원리로 서로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고독은 자신을 초월하여 너(altro-Altro)에게 건너갈 수 있는 장치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너를 만나 이루는 하나됨의 기쁨은 순수가 있어야만 영원히 가능하다. 이 본성의 가장 완전한 모습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 우리를 찾아 하늘에서 오셨고(물리적·역사적인 몸), 교회 안에서 영원히 내어 주신 그분 안에서 찾은 몸의 의미다.(성체적인 몸) 그래서 몸의 길은 사랑의 길이고, 인간도 사랑도 신비로 가득하다. 인간에겐 땅(자연적인)의 가치를 열심히 찾아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고, 반대로 초월적 가치를 부지런히 찾아도 닿지 않는 무엇이 있다. 자연적인 가치와 자아 초월적인 가치가 함께 있는 긴장감, 그 긴장감으로 끊임없이 성장 변화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요 매력이다. 사랑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적 사랑이 신적 사랑으로 변화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낳음 받았고, 행복하라고 몸을 주셨다. 때가 되면 하느님은 이 몸과 눈물만을 거두어 영광으로 완성시키실 것이다. ‘원순수’에 대한 가르침이 교리서 전반에 흐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원순수 상태를 회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복을 의미하는데, 루카 복음 15장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너무나 멀리 간 지방의 의미, 돼지들의 먹잇감이라도 먹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 먹이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탕진됐음을 알았고, 자신의 정체성 회복은 아버지의 집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와의 원체험을 기억하고 되돌아갈 용기를 얻는다. 원순수의 회복은 인간이 가야 할 진리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처음 상태를 회복했고,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회복하는 은총을 반복 체험한다. 이것이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해 사람이 되신 신비의 궁극적 목적이다.(로마 8,23 참조) 20세기 들어 새로운 인간학이 세상에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정합적 인간학(Antropologia adeguada)이라는 새로운 단어로 인간을 정의했고, 교리서를 통해 선포했던 것이다. 새로운 인간학에서는 인간을 페르소나(persona)라 정의한다. 우리말에선 인격, 사람, 인간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지만, 그 어느 단어도 본래의 뜻을 다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어떤 것을 통해서 연주하다’(per-suonare)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하느님은 인간을 통해 연주하고, 남편은 아내를 통해 아내는 남편을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단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페르소나의 개념이 삼위일체 및 그리스도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형성됐고, ‘인격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넓혀졌다. 인간 본성의 내적 특징이 강조된 ‘Persona’를 첫 글자 ‘P’가 대문자일 때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칭하는 ‘위격’으로, 소문자일 때는 대체로 인격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는 뜻으로 번역했다. 하느님과의 내적이고 역동적인 구조 안에서 하느님 모상으로서 인간을 생각한 개념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만 해소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그것은 ‘낳음’ 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 그 정점에 이르면 하느님을 만난다. 시작과 최종 목적에서 이해되지 않는 인간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고독-일치-순수가 인간 편에서 느끼는 내적 지각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초월성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인간을 보이는 모습 그것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이 나이고 너이고 우리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원순수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는 원순수의 의미에 좀 더 깊이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원순수는 원고독·원일치와 함께 사람이 누구인지 계시되는, 인간 창조에 담긴 하느님의 계획을 열어보는 결정적인 열쇠이기 때문이다. “원초적 알몸의 의미는 성경에 나오는 인간학의 첫 밑그림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학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이해하게 해 주는 열쇠입니다.”(교리서 11과 2항) 알몸이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은 갓난아이와 같아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를 의미하지도, 결혼하고 첫날을 지낸 신랑신부가 배우자의 몸을 보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몸의 언어가 갖고 있는 더 깊은 차원을 표현한 것으로 성의 다름, 즉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호 내재적 관계를 드러낸 표현이다. 여기에 가톨릭 사상의 놀라운 변화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몸은 ‘성사 이전의 성사입니다.’ 오직 영원한 사랑(Amore)의 가시적 표지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Trittico romano, II, 3) 이는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줄 수 있는 초월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다른 이를 향해 있는 존재라는 것,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꿈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하느님을 닮은 그것,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고자 하는 선(좋음)이 타자를 향해 본성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처음 사람들은 서로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줌(dono di sé)을 알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앎을 실천한 의식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안 것을 숨기거나 남기지 않고 주었기에 알몸이었고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므로 몸의 언어인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다’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윤리적인 부분을 다룬 것이다. 어떤 강압이나 다른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은 온전한 자유로움 안에서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낳음 받았음을, 내 몸은 이미 하느님의 성사임을 기억할 때, 상호 인격적 내어줌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사랑과 자유를 선물로 주셨고, 죄성이 발견된 후(창세기 3장의 상태)에도 거두어 가지 않으셨다. 사랑은 반드시 자유가, 자유는 진리 안에서 가능하다(요한 8장 참조).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다스림과 절제가 가능하고 덕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교리서에서는 알몸의 의미를 ‘자연주의적’이라기보다 ‘인격주의적’이라고 정의한다. 벗어서 알몸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입지 않은 ‘존재’, 선물의 ‘존재’이므로 하느님 앞에서 원순수의 존재와 양심이 살아나야 하는 것, 우리가 되돌아가야 하는 회복해야 하는 이유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을 몸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랑이 가진 두 관점, 즉 본능과 자유, 신앙과 이성, 에로스와 아가페를 분리하지 않고 한 인간을 통합적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다. 종교학자 크리스티나 트라이나는 “육신은 성사적 의미를 갖는다” 했다.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 질문의 핵심을 놓치는 순간 내 마음도 삶도 자신의 욕망에 갇힐 수 있다.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인간 앞에서 어떤 전망을 갖기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고, 그 답은 한처음 즉 이미 나를 창조하실 때 그분의 계획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당시 사회 지도자들)에게 무지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02 제3431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역사적인 몸, 초월적인 몸

우리의 생각에 변화를 줄 몇 단어를, 사람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 앞에 있는 다른 사람을 보고 경탄하기에 이르는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창세 2,21-23). 첫 번째는 깊은 잠이다. ‘잠’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되지만, 창세기 2장 야훼계 신학에서 사용된 ‘잠 (tardemah)’은 그 의미가 다른 단어이다. 일반적인 잠이 아니라 여자의 창조 활동에 하느님 행위의 독자성을 강조한 유비(analogia)적 표현이다. 즉 잠은 창조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이고, 특별한 신적 행위가 일어나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교리서 3, 8과 참조) 두 번째는 ‘갈빗대’다. 70인역 번역본에서 ‘갈빗대’로 번역된 이 단어는 고대 수메르 설형문자에서 ‘생명’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다. 하느님께서는 갈빗대가 있던 자리를 살로 덮으시지 않고 메우셨다는 의미에 좀 더 깊이 다가가야 한다. 세 번째는 ‘살과 뼈’다. 히브리인에게 몸은 인격성의 외적 표현이고, 뼈는 인간 존재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내 뼈에서 나온 뼈’는 ‘존재로부터 존재’를 가리키는 관계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고, ‘내 살에서 나온 살’은 신체적 특징은 다르지만 서로의 인격은 같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첫 사람의 뼈로 여자를 지었고, 그 자리를 살로 메웠다는 성경언어는 같은 혈통, 동일한 계보에 속함을 가리키면서 남자와 여자의 본성이 ‘동질함’을 말한다. 네 번째는 창세기 2장 18절의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다. 이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여러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살펴보면, 이 단어가 조금씩 다르게 번역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알맞은’은 ‘닮은’과 연결되지만 하느님을 닮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이므로 성경적 의미에서 땅에 있는 너를 받아들임, 한 인격 ‘곁에’ 있는 한 인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그 ‘도움(aiuto)’을 가리킨다(교리서 9과 참조). 본뜻을 숨기고 상징과 은유로 표현한 갈빗대, 즉 남자의 여자, 두 사람의 동질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알맞은 협력자’의 의미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고, 자칫 파트너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분명 나와 다름에도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하는 이 외침은, 다른 존재로 인한 기쁨, 내 앞에 있는 또 다른 ‘나’로 인한 기쁨으로 하나됨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둘 다 알몸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라고 한다. 앞에 수식어를 보면 그냥 한 남성성과 한 여성성의 관계가 아닌 ‘사람과 그 아내’의 관계, 즉 혼인의 관계이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그 사람의 몸을 보면서 자기 몸의 의미를 알게 됐고, 주저함 없이 주면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너는 내가 소유할 누구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누구이고, 나를 선물로 내어주고 또한 선물로 받아들임을 알몸으로, 그래서 온전히 하나가 됐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기 배우자가 ‘또 다른 나(altro is)’이다. 소문자 ‘a’를 대문자 ‘A’로 쓰면 하느님을 뜻한다. ‘너’ 깊숙이 들어가면 ‘너’를 만드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결국 하나됨은 서로를 바라보고 그 사람에게 집중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그 사람 안에 있는 근원적인 사랑을 바라볼 때 자신을 초월하는 일치에 이른다. 인간에 대한 존재적 질문, 즉 ‘나는 몸이다’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인간은 관계성의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몸이 너를 받아들이는 ‘집’(관계성의 존재)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2-23 제3430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원일치, 인격들 간의 친교

하느님 손에 의해 빚어진 한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자신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를 보고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본능적 고백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했으면 내적 깊은 곳에서부터 이런 감탄이 터져 나왔을까? 이 감탄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너’가 정말 아름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뼈에서 나왔고 내 살에서 나왔으니 ‘나’도 멋지다는 것이다. 나와 너를 동시에 긍정한 이것을 ‘원일치’라 한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러한 일치를 갈망하며, 일치할 수 있는 조건도 제시된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는, 다르게 표현하면 나를 긍정하고 너를 긍정할 때 일치할 수 있는 능력이 샘솟는다. 어느 날 선물처럼 너는 내 삶에 들어왔고, 나 또한 너의 삶에 들어가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하게 알았던 것처럼, 나도 너를 만나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더 완전하게 알게 됐으니, 그대가 바로 나의 얼굴이다. 이는 너의 삶이 내 삶이 되었다는 의미이고, 나의 삶 또한 너의 삶이 됐다는 뜻이다. 이러한 일치에는 중요한 특성이 있다. 같아서 이루는 일치가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치(하나)이다. 일치라고 쓰고 행복이라 읽는 두 사람의 역사가 출발했는데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보이는 것만 다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각, 성격, 시각 등등, 도대체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엔 다름이 신기했는데 시간에 시간이 더할수록 불편했다. 다름을 써놓고 틀렸다고 읽으며 밀어냈다. 너를 밀어내고 보니 나도 나의 정체성에서 멀어졌다. 이제 다시 틀림이라 읽지 않고 다름으로 읽으니 처음 상태로 돌아가 그가 다시 보이게 됐다. 새로운 시선이 생겼다. 너의 시선도 나의 시선도 아닌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의 시선을 갖게 됐다. 그것이 아담의 고백이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너’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너도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성(남성성-여성성)과 다른 너의 성을, 몸에 쓰여진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된다. 내가 너에게 갈 수 있는 길은 나를 탈출해 너에게 갈 때에 가능하다. 이는 인간이 지닌 초월성으로 가능하다.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하여 인간이 됐듯이, 인간도 자신을 탈출해 너를 만나 하나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남성성과 여성성을 생물학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부정적 사고와 힘(경제력 권력 등)의 논리로만 받아들인다면, 성을 역할 분담이나 서로에게 필요한 파트너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남성성, 여성성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보이는 육체적 차원을 넘어 보이진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신 그 신비가 있다. 교리서 제8과 1항은 이렇게 표현한다. “‘원고독’의 의미는 ‘원일치’(unità originaria) 의미의 일부를 이룹니다.” 결국 인간은 고독을 통해 자신의 고유성을 찾고, 자신에서 탈출하여 너에게 가는 친교적 일치를 이루게 된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이 고백에는 서로의 성(性)은 다르지만 본성은 동질함을 의미한다. 너는 내가 소유할 누구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누구이며,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씀이 지닌 진리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2-16 제342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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