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숨날숨의 길이와 시간의 마디에 대해서 나는 좀 별다른 경험을 하였다. 중학교 시절 나는 땅에 매몰되었다가 사람들에 의해 발굴된 적이 있는데, 워낙 별스런 사건이라서 사실인지 오해도 받았던 이야기다.
그 해는 유난히 가물었고, 천수답에 가까운 섬마을의 전답은 목이 타고 있었다. 임시휴교로 학교공부 대신 물대기 작업을 도우라는 지침이 있어서 우리집 식구들은 웅덩이의 수로 연장공사를 했다. 모래땅을 깊이 파내려 가면 지하수의 맥을 만날 수 있고, 그 물을 웅덩이에까지 연장하는 작업을 했는데, 지표에서 깊이 3미터쯤에서 마침내 내가 수맥을 찾았고, 기쁜 나머지 곡괭이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
그런데, 땅을 울린 소리의 공명이 좁고 깊던 좌우의 벽을 흔들어 순식간에 나를 덮어 버렸던 것이다. 땅속에서 느꼈던 흙의 움직임은 지금도 생생한데, 목과 팔다리 사이의 틈새를 공백 없이 채우며 압력이 증가하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속절없이 화석이 되어가고 있던 중에도 숨을 쉬면 살 수 있을 줄 알고 호흡을 시도해 보았으나, 모래땅인데도 마치 비닐을 막아둔 것처럼 공기는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손으로 파헤쳐 흙 속에서 얼굴이 드러나기까지는 5분가량이었다고 했는데, 들숨과 날숨이 얼마나 은혜로운 작용인가를 실감했다. 중년이 되어, 수년 동안 달고 살던 담배를 끊을 때도 불현듯 되살아난 이 기억이 수백 볼트의 전류처럼 한방에 나를 KO시켰다. 이 은혜로운 공기를 연기에 버무려 몸속에 불어 넣다니…
임종을 앞둔 부친의 병상을 지킬 때도 그랬다. 여러 개의 호스가 연결된 몸은 힘들게 이승의 시간을 연장하고 있었는데, 온몸의 근육을 다 움직여도 끌어당기기가 어려운 들숨, 그리고는 이내 비탈을 굴러떨어지는 날숨, 내쉰 숨이 다시 들숨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들이쉰 숨이 다시 날숨으로 바뀔 수 있을지, 속절없이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어둠 속의 그 숨소리는 마치 갯벌을 기어가는 집게고동의 발자국처럼 내 마음에 굵은 금을 그으며 저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풍경화 같았다. 그렇게 ‘숨 한 번 쉬는 동안의 시간’의 의미를 확인하였다.
100미터 달리기의 세계기록 보유자인 우사인 볼트는 출발해서 결승점까지 숨을 쉬지 않는다고 들었다. 온몸을 긴장시켜 폭발적 에너지를 방출해야 하는 9초 남짓한 시간 동안, 그야말로 무산소 운동을 한다는 것인데, 제주도의 해녀들 중에 상군급의 베테랑들도 한 번 몰아쉰 숨으로 5분 정도를 물밑에서 지낼 수 있단다. 암튼, 들숨과 날숨의 간극은 살아 있는 생체가 느끼는 최소단위의 시간이고,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라는 주장은 이 정도로 해두자.
복잡한 일들 속에서 사는 우리로서는 호흡을 가다듬는 일이 쉬운 과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모든 가치와 고정관념을 새로운 기준으로 정기점검하는 때가 신앙인에게 주어진 부활 시기다. 시간의 단위를 새롭게 재설정하고 가시영역에서만 바라보고 평가하던 것들을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것들과 연결지어 보자. 들숨과 날숨으로 시간의 단위를 나누고, 조심조심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상의 징검다리를 건너보자. 혹시 하느님께서 나에게만 설계해 두신 초월적 생명장치는 어떤 것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며.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