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성당 순례

[수원교구 성당 순례] 평택성당

박효주
입력일 2025-06-25 08:33:26 수정일 2025-06-25 08:33:26 발행일 2025-06-29 제 344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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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한발 계단 오르면 주님이 두 팔 벌려 맞아 주는 곳

수원교구 평택본당(주임 김현중 요한 보스코 신부)은 하느님의 종 조제프 몰리마르 신부(Joseph Molimard, 牟 요셉, 1897~1950)에 의해 시작된 역사 연구와 보존, 몰리마르 신부의 유해 안치 등 성역화를 위해 노력 중이다. 본당 공동체의 보금자리인 성당 또한 하느님이 사랑하신 아름다운 자연과 신자들의 기도를 돕는 성상 등이 자리한 ‘찾고 싶은’ 공간이다. 6·25 한국전쟁 때 순교한 몰리마르 신부가 사랑한 곳, 6월 끝자락에 더욱 의미가 깊은 평택성당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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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평택성당 전경. 다양한 나무와 꽃들로 이뤄진 성당 마당은 에덴동산을 연상시킨다. 박효주 기자

땅에 모든 걱정 내려두고 한발한발 천국의 계단으로

유치원 건물을 지나 성당 안으로 들어오면 복잡한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나무와 꽃이 빽빽이 자리한 가운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 루르드 성모와 성 베르나데트 조각상이 들어선 ‘하늘 섬’ 같은 이곳은 자연스레 신자들을 묵상의 길로 이끈다. 예수님 조각상이 맞이하는 한가운데 계단, 혹은 왼쪽의 십자가의 길이 놓인 둥근 오르막길에 의해 이곳 지상과 성당이 있는 천상이 분리된 듯하다. 땅에 모든 걱정을 내려두고 한발 한발 천국의 계단을 올라가 본다.

상부 공간의 성당 마당은 태초의 에덴동산이 생각날 만큼, 다른 곳에 비해 나무와 바위, 꽃이 울창하면서도 질서가 공존했다. 성당 건물 바로 앞에는 우람한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다. 몇 년 전 고사 위기를 겪기도 했던 나무의 나이는 200살. 100년 가까이 된 성당의 모든 역사를 나무는 성당 터 한가운데에서 지켜봤다. 느티나무뿐 아니라 봄에는 이름 모를 들꽃까지 가득 피어 성당에 고운 빛을 더한다. 마당에는 놓인 의자와 테이블이 잠시 숨 고르고 쉬라고 반갑게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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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있는 십자가의길은 돌에 새겨져 있어 단단한 신앙심을 고취시킨다. 박효주 기자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 마리아’ 주보로 모셔…파티마·루르드 성모상도 순례자 맞이

본당은 1928년 설립됐으며 현 성당은 1971년 재건축한 것이다. 본당 주보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 마리아’ 부조가 성당 종탑 외벽에 걸려 있다. 

성모님을 주보로 모신 본당답게 곳곳에는 다양한 성모님이 모셔져 있다. 성당 문 왼쪽에는 돌아가신 예수님을 안고 있는 피에타상이, 성당 안에는 파티마 성모상이 신자들을 맞이한다. 루르드 성모님도 계단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의 창문은 형형색색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한국의 전통 격자무늬 한지 문을 그대로 가져와 성당의 100년 역사를 드러냈다. 창 옆에는 나무에 파스텔톤 색상을 입힌 십자가의 길을 놓아 바위에 무채색으로 새겨져 있던 마당 십자가의 길과 대조를 이룬다.

성당을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사무실과 교실 등이 있는 몰리마르 관이 있고 오른쪽은 대강당이다. 몰리마르 관 앞에는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몰리마르 신부 흉상과 어우러져 순교의 의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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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을 주보로 모시는 평택성당 곳곳에는 다양한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왼쪽부터)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위치한 루르드 성모(오른쪽)와 성 베르나데트의 성상, 성당 외벽에 조형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 마리아’ 부조, 제단 앞의 파티마 성모상 모습. 박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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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성당 내부 전경. 박효주 기자

본당 역사의 시작 하느님의 종 몰리마르 신부…현양과 성역화 노력 지속

몰리마르 신부는 프랑스 님교구 보베르에서 태어났다. 1924년 사제품을 받은 뒤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고 1925년 한국에 파견됐다. 황해도 매화동본당, 경기도 병점 공소를 거쳐 1928년 비전리본당(현 평택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10여 년을 평택본당에서 사목했다.

부임 전 야산을 매입해 성당 건물을 지은 몰리마르 신부는 서정리(현 평택시 서정동)에 공소 경당을 신축하는 등 신앙의 중심인 성전 건립을 통해 전교에 힘썼다. 매월 본당 소식지인 「성모 월보」를 발행해 신자들을 교육하고 신심을 고취시켰으며, 어린이를 사랑하고 늘 근검절약하면서 청빈한 생활을 했다.

본국에서 휴가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몰리마르 신부는 평택본당 3대 주임과 서정리본당 초대 주임을 역임한 뒤 1948년 대전지목구가 신설되며 충남 금사리본당 주임으로 임명됐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여로 피신했던 그는 다시 성당으로 돌아와 교우들에게는 나오지 말라고 당부한 뒤 홀로 미사를 봉헌했다. 8월 말 인민군에게 체포된 몰리마르 신부는 대전 프란치스코 수도원으로 압송됐고 9월 23~26일 사이 수도원 뒤편 언덕에서 53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몰리마르 신부는 일찍이 유서를 통해 자신의 유산으로 부여나 규암에 성당이 건축되기를 희망했고, 유언에 따라 1955년 9월에 규암, 1972년 12월에는 부여에 본당이 설립됐다.

마당 끝 쪽에는 경건함이 느껴지는 묘가 있다. 본당 초대 주임 몰리마르 신부의 무덤이다. 오랜 노력 끝에 본당은 2003년 몰리마르 신부의 유해를 모셔 왔다. 교육관의 이름을 ‘몰리마르 관’으로 바꾸고 흉상을 세웠으며, 자료집 발간을 통해 몰리마르 신부를 현양하며 성당 성역화 작업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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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과 교실 등이 자리한 몰리마르 관 앞에는 몰리마르 신부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박효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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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마당 끝에는 2003년 모셔 온 몰리마르 신부의 묘소가 경건하게 마련돼 있다. 박효주 기자

박효주 기자 phj@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