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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4)최양업의 성소가 성장한 못자리를 찾아서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1-19 수정일 2022-01-19 발행일 2022-01-23 제 327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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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풍경 곳곳에서 만나는 조선 신학생의 자취
조국으로 돌아갈 기약 없는 타국생활
낯선 환경 속에서도 신학공부에 매진
귀국 실패 후 소팔가자에서 부제수품
쉬자후이 예수회 본부에서 수학하며
“신부님들에게 많은 신세” 편지에 언급

최양업이 부제품을 받은 중국 지린성의 소팔가자 성당은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성당으로 다시 세워졌다.

지금은 비행기로 4시간이면 도착하는 마카오. 185년 전 최양업과 2명의 신학생은 5000㎞가 넘는 길을 걸어 7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한다. 두 계절을 쉬지 않고 걸으며 16살 소년 최양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국으로 돌아갈 기약이 없는 답답한 시간들을 버티며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하느님에게 의지했을 최양업. 그의 성소의 씨앗이 단단히 뿌리내렸던 여정을 다시 밟아본다.

■ 마카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대목구를 북경교구에서 분리하고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했다. 이후 3명의 조선인 신학생은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여름이 시작되는 6월, 마카오에 도착한 최양업은 조선과는 다른 기후와 풍경, 낯선 사람들 사이에 놓였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자리에는 현재 상가와 아파트를 겸한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건너편에 세워진 성 안토니오 성당만이 당시 최양업의 흔적을 간직한 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 하나인 이곳은 가톨릭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역사를 보여준다. 또한 홍콩의 교포 신자가 기증한 김대건 신부의 목상과 유해가 남아있는 성 안토니오 성당에서 오래전 이곳에서 간절히 기도했을 조선 신학생의 모습을 기억하고 묵상할 수 있다. 또한 성 안토니오 성당에서 멀지 않은 카모에스 공원에서는 타국생활로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했을 최양업을 만날 수 있다.

■ 필리핀 롤롬보이

필리핀 불라칸(Bulacan) 지역의 롤롬보이(Lolomboy)에서도 최양업과 김대건이 머물렀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작은 마을 롤롬보이는 지금의 한국과 많이 다른 모습이지만, 180여 년 전 조선과도 생경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당시 아편문제로 혼란에 빠진 마카오를 피해 필리핀의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공부를 이어간 김대건과 최양업은 이곳에서 1년 넘게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입구에서 맞이하는 최양업 신부와 김대건 성인의 동상은 짧은 기간 이곳에 머물렀던 조선의 신학생을 기억하고자 했던 마을 사람들의 뜻을 엿볼 수 있다. 관상의 7단계를 상징하는 7궁방탑도 이곳의 명소로 꼽힌다. 필리핀의 이국적인 풍경 사이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이 건물을 통해 이방인인 두 조선인 신학생이 필리핀 작은 마을에서 어떤 마음으로 공부를 이어갔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근방에서 가장 높은 이 건물에서는 롤롬보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피정을 할 수 있는 방도 층마다 마련해 놨다.

최양업 신부 사제수품 장소로 추정되는 장가루 성당.

■ 중국 소팔가자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시(長春市)에서 약 30㎞거리에 있는 소팔가자(小八家子, Xiaobajiazi) 마을. 이곳 소팔가자 성당에서 최양업은 부제품을 받는다. 1796년 교우촌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소팔가자는 마을에 사는 8가구가 모두 신자여서 팔가촌이라 불리게 됐다. 소팔가자라는 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마을 주민의 95% 이상이 가톨릭 신자일 만큼 중국 가톨릭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마을. 파즈 함장이 지휘하는 파보리트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나 귀국하려다 실패한 뒤 이곳에 도착한 최양업은 신심 깊은 주민들을 만나 다시 공부에 전념하고 귀국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김대건로(金大建路)’라 이름 붙은 도로를 따라 도착한 마을 곳곳에서 조선 신학생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최양업이 부제품을 받은 소팔가자 성당은 새단장을 마치고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성당으로 다시 세워졌다. 성당 뒤쪽에 세워진 김대건 기념관과 김대건 성인 동상은 중국의 작은 마을에 남아있는 조선인 신부의 신앙과 삶을 기억하도록 이끈다.

■ 중국 쉬자후이

1847년 예수회는 중국 상해 쉬자후이에 본부를 세우고 성당과 수도원, 학교, 박물관 등을 건립한다. 1849년 5월 12일자 편지에 남긴 “예수회 신부님들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체류하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아 많은 신세를 졌다”는 글을 통해, 최양업이 이곳 예수회 본부에서 신학공부를 하며 많은 용기와 힘을 얻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양업이 사제품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예수회 신학원 소성당으로, 새 성당인 성 이냐시오 성당은 1851년 건립됐다. 지금의 쉬자후이 성당은 같은 자리에 1910년 건립된 성당이다. 두 개의 종탑을 가진 전형적인 프랑스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교회사 학자들은 최양업이 쉬자후이 성당이나 옛 포동(浦東) 장가루촌에 있었던 장가루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