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주교좌 기도 사제의 하루] "신자들 가까이 머물며 함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2-09-28 수정일 2022-09-28 발행일 2022-10-02 제 3312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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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장 특임사제로 임명
검은 비레타 착용 등 ‘눈길’ 
교구 모두 위해 기도하는 역할
성무일도 등 기도 모범 보일 것

주교좌 기도 사제들. 왼쪽부터 여인영 신부, 유승록 신부, 박경근 신부, 정운필 신부.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검은 비레타(사제각모)를 쓰고, 검은 띠를 두른 이들의 모습이 이목을 사로잡는다. 명동대성당을 찾는 이들을 맞는 이 사제들은 주교좌 기도 사제들이다. 모습도 이름도 생소한 주교좌 기도 사제. 주교좌 기도 사제의 하루를 따라가 봤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오늘은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전례로 기도하겠습니다.”

9월 23일 명동대성당. 시간전례(성무일도)를 바치기 앞서 유승록(라우렌시오) 신부가 신자들에게 시간전례를 바치는 방법을 알려주고 오늘은 어떤 시간전례를 바치는지 공지했다. 「성무일도서」를 준비하지 않은 신자들도 함께할 수 있도록 스마트폰 앱 사용법도 설명했다.

주교좌 기도 사제는 교구장 주교 곁에서 교구장을 비롯한 모든 교구 공동체 구성원을 위해 기도에 전념하는 서울대교구의 교구장 특임사제다. 주교좌 기도 사제들은 특별히 매일의 시간전례, 즉 성무일도를 철저하게 준수하면서 기도생활을 한다.

그러나 이 시간전례는 사제들만의 기도가 아니다. 평일 오전 7시30분, 오전 11시45분, 오후 5시30분에 명동대성당을 찾는 이라면 누구라도 이 기도에 함께할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의 정신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기도를 모든 이에게 열어둔 것이다.

주교좌 기도 사제 여인영(요한 사도) 신부는 “여태 혼자 기도하고 묵상해왔는데, 이제 신부님들과 함께, 또 신자들과 함께 기도한다”며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많은 이들이 힘든 때에 기도 속에서 어려움을 나누고 하느님 안에서 답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9월 23일 명동대성당에서 주교좌 기도 사제들이 시간전례(성무일도)를 바치고 있다.

주교좌 기도 사제가 활동을 시작한 이래 줄곧 함께 시간전례를 바쳤다는 김은희(로사리아·59)씨는 “성무일도는 신부님이나 수녀님들만 바치는 줄 알았는데, 평신도도 함께 바칠 수 있는 자리가 있어서 좋다”면서 “신부님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니 기도생활을 배울 수 있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주교좌 기도 사제들이 신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시간전례를 바치는 때만이 아니다. 주교좌 기도 사제들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약 1시간가량 명동대성당 마당을 순회한다. 그저 산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당을 찾는 신자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긴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지만, 안수나 성물 축복을 해주기도 하고, 교회에 관해 묻는 신자들에게 답을 해주기도 하는 등 신자들과 만나고 있다.

유 신부는 “교회에 관해 안내하거나 축복이나 안수 등을 드리기도 한다”며 “주교좌성당에 온 신자분들께 사제가 가까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설명했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침잠(沈潛). 조명도 하나 밝히지 않은 고요한 명동대성당 안에서 깊은 침묵 속에 잠긴 주교좌 기도 사제들의 모습은 ‘침잠’ 그 자체였다. 주교좌 기도 사제들은 매일 11시부터 45분간 거룩하신 성체 앞에 머무른다. 신자들을 만나고,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도 주교좌 기도 사제의 주요 활동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본분은 기도, 바로 하느님과 만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주교좌 기도 사제들과 함께 성체조배를 한 노귀연(마르타·60·수원교구 위례성데레사본당)씨는 “조용히 묵상하러 왔는데 신부님들이 기도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차분해지고 좋았다”면서 “큰 맘 먹고 순례왔는데 신부님들의 기도에 참여할 수 있어 뜻 깊었다”고 말했다.

9월 23일 명동대성당 마당에서 주교좌 기도 사제들이 성당 순회를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수도회에는 장상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하느님 뜻 안에서 식별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는 수도자들이 있었다. 이런 전통이 교구에도 이어졌고, 교구장 주교가 하느님 뜻에 맞갖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돕는 사제들을 ‘의전사제단’이라 불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제평의회나 참사회 등이 교구장 주교의 결정을 위해 자문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이 ‘의전사제단’의 전통을 이은 것이 주교좌 기도 사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자주 착용하지 않게 된 복식인 비레타와 띠를 착용한 것도 전통의 계승을 느끼게 해준다. 사제각모라고도 부르는 비레타는 지금은 주교나 추기경의 복장으로 여겨지지만, 이전에는 사제들도 검은 비레타를 착용했다. 사제복을 입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초상에서도 검은 비레타를 볼 수 있다.

주교좌 기도 사제들은 명동대성당에서 기도하는 시간 외에도 주교좌 기도 사제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사제관에서 매일 공동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규칙적인 시간전례와 성체조배로 하루하루를 맞고 있다. 그렇게 다양한 사목현장에서 활동해온 사제들 자신도 기도 안에서 성화시켜나가고 있다.

유승록 신부는 “본당 등에서 사목을 하다보면 기도에 소홀하게 될 수 있는데, 공동으로 정해진 시간에 따라 기도를 바치는 단순함을 통해 일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고 있다”며 “그동안의 사제 생활을 성찰하고 정리해보는 시간도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는 교구 문화홍보국 유튜브를 통해 “주교좌 기도 사제는 교구장 옆에서 함께 기도하고,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하느님과의 만남인 기도는 모든 교구 신부님들에게도 필요한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신자들에게 “성무일도는 성직자 전유물 아니라 온 교회의 기도”라면서 “명동대성당에 편안하게 오셔서 주교좌 기도 사제들과 함께 성무일도 바치시는 좋은 체험을 하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9월 23일 명동대성당 마당에서 주교좌 기도 사제 여인영 신부가 한 신자에게 안수를 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