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세계 병자의 날 특집] 한국교회의 무료진료 여정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3-01-31 수정일 2023-01-31 발행일 2023-02-05 제 3329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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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도 생명만은 지켜야…” 주님 모시듯 병자 돌보는 교회
노숙자와 외국인 노동자 등
병 돌보고 급식·옷 등 나눠줘
일부 병원 항의받으면서도
묵묵히 복음적 가치 실현

1월 29일 안산빈센트의원에서 가봉 국적의 부부가 진료를 받고 있다. 한국교회는 의료혜택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돌보고자 무료진료소들을 운영하고 있다.

“밤새 하혈이 멈추지 않는데 병원을 갈 수 없어서 찾은 게 이주사목을 하는 신부님이었어요. 죽음의 문턱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절박한 사람들이 우리 곁에 여전히 존재하기에 무료진료소 운영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안산빈센트의원 원장 양수자(이다 마리아) 수녀는 사제를 통해 안산빈센트의원을 소개받아 겨우 목숨을 구한 태국인 이주노동자 이야기를 꺼내며 무료진료소가 우리 사회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주변에 병원이 즐비한데도, 이들이 병원에 갈 수 없는 이유는 ‘가난’ 때문이다. 돈과 생명을 바꾸어야 하는 잔혹한 상황은 개발도상국이 아닌 2023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제31차 세계 병자의 날(2월 11일)을 앞두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걸어가는 교회의 여정을 소개한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 메리놀 외방 전교회가 충북 증평지역에 세운 메리놀병원 소속 수녀가 환자를 살펴보고 있다. 청주교구 증평본당 제공

■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입니다”

전쟁이 끝난 1950년대 한국은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폐허가 된 도시를 재건하는 데도 역부족인 상황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손을 잡은 것은 교회였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구호활동을 펼쳤다. 무료진료도 중요한 선교활동 중 하나였다.

1958년 한국에 진출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는 성모의원을 열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가운데 머물렀다. 메리놀 외방 전교회는 충북 증평지역에 메리놀병원을 세우고 아픈 사람들을 돌봤다. 1956년 대전에 지어진 희망의원도 전쟁 이후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무료진료했다.

1950년대 후반 시작된 수도회들의 의료지원은 전쟁의 상흔이 아문 뒤에도 계속됐다. 여전히 가난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수녀회 설립자인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 걸인, 행려자들이 병원에서 박대를 받으며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1982년 세워진 도티기념병원은 “도시 영세민들에게 무료 의료혜택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라는 알로이시오 몬시뇰의 뜻에 따라 중증 장애인, 부랑인, 외국인 노동자 등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무료 자선병원으로 지역민들과 함께했다.

이후 서울 영등포동 요셉의원(1987), 서울 하월곡동 성가복지병원(1990), 대구 남산동 성심복지의원(1992) 등이 연이어 문을 열었다. 이들 병원은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보살핀다’라는 공통된 복음적 가치를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다.

질병에 취약한 이들이 이용하는 만큼 진료과목도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다. 차상위 계층과 노숙자, 행려환자, 무의탁자, 외국인 노동자, 암보험과 생명보험을 가입하지 않은 호스피스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가복지병원은 내과, 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비뇨기과, 안과, 이비인후과, 정신건강의학과, 부인과, 피부과, 치과, 통증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요셉의원은 20여 개 진료과목은 물론이고 재활프로그램을 비롯해 무료급식, 목욕, 옷 나눔 사업도 펼치고 있다. 요셉의원은 하루 평균 100여 명, 성가복지병원은 토요일 평균 250~300명가량의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 교회의 여정은 교회 밖 시선과 충돌하기도 했다. 도티기념병원이 주변 병원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환자 본인부담금을 면제·할인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행정지도를 받은 것이다. 결국 도티기념병원은 2017년 문을 닫았다. 부침을 겪으면서도 교회의 병원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진료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의 주님’이기 때문이다.

충북 증평 메리놀병원 앞에 환자들이 줄 지어 서 있다. 청주교구 증평본당 제공

서울 성가복지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요셉의원에서 봉사하는 치과의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다시 힘을 모은 교회

1월 29일 오후 1시, 한양대학교 ERICA 캠퍼스가 있는 안산시 사동은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가 한산한 모습이었다. 텅 빈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 대부분은 두꺼운 패딩을 입은 흑인이었다.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은 동네에 온 외국인의 정체가 궁금해 뒤를 따르니 발길이 멈춘 곳은 안산빈센트의원이었다. 의원 안은 텅 빈 밖과 달리 외국인 환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산전검사를 하러 온 가봉인, 고혈압약을 타러 온 러시아인, 일하다 허리를 다친 카메룬인 등 다양한 국가 출신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다.

무료진료소로 문을 연 안산빈센트의원이 진료하는 대상은 건강보험증이나 보호증이 없어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극빈환자다. 환자 대부분은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다.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으로도 확장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다. 비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료혜택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돌보고자 교회는 서울 라파엘클리닉(1997)과 춘천 예리코클리닉(2003), 인천 가톨릭무료진료소, 안산빈센트의원(2004)도 차례로 문을 열었다.

안산빈센트의원 원장 양수자 수녀는 “2000년대에는 외국인 노동자가 많았다면 2015년 이후로는 기후난민, 전쟁난민들이 의원을 많이 찾고 있다”며 “갑자기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기에 더욱더 경제적인 상황이 어렵고, 병의 중증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건강보험 혜택이 확대돼 중국이나 베트남, 필리핀 사람들이 의원을 찾는 횟수는 줄었지만,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온 환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하루 일해 하루 먹고 사는 형편에서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한 이들은 대부분 병을 키운 뒤 절박한 상황이 돼서야 무료진료소를 찾는다는 게 양 수녀의 설명이다.

인천교구 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김현우(바오로) 신부는 “외국인 산모들은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조산이나 고위험 신생아를 낳을 확률이 높다”며 “비용 때문에 산전진료를 받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인천 가톨릭무료진료소는 인근 병원과 협력해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양 수녀도 “미등록 외국인들은 제때 치료하지 못해 몸이 아프면 결국 일을 구하지 못하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 의원에 오시는 분들은 여기가 아니면 갈 데가 없는 벼랑 끝에 서 계신 분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코로나19로 무료진료소 운영이 주춤하면서 의료 봉사자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가난 때문에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절박한 이들을 위해 관심 가져 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