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성당 순례

[수원교구 성당 순례] 조원동주교좌성당

이승훈
입력일 2024-12-02 수정일 2024-12-02 발행일 2024-12-08 제 342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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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어머니께 바치는 기도, 성당 감싸며 수놓은 참 신앙의 빛

수원교구의 주보와 같은 주보를 모신 성당이 있다. 교구의 두 번째 주교좌성당이자, 현재도 공동 주교좌성당으로 주교좌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제1대리구 조원동주교좌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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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성당 평화의 모후 성모상. 이승훈 기자

■ 평화의 모후께 봉헌된 성당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조로 978번길 5.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아 든 조원동주교좌성당 성모상 아래에는 ‘평화의 어머니’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바로 조원동주교좌성당의 주보인 ‘평화의 모후’를 나타내는 성모상이다.

평화의 모후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성모님을 부르는 호칭 중 하나다. 성모님은 평화의 왕인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아 세상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올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실 때도 곁을 지키고 있었고, 승천 이후로도 세계 곳곳에 발현해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할 것을 가르쳐왔다. 

특히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발현한 성모님은 세계 평화를 위해 매일 묵주 기도를 바치고, 성모성심을 공경하고, 죄인을 위해 희생하라고 당부했다.

그런 성모님이기에 우리는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로 모셔 왔고,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평화의 모후’께 전구를 청할 수 있도록 성모호칭기도에 ‘평화의 모후’를 추가했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빚어진 사회적 혼란과 폐허를 딛고 평화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교구가 평화의 모후를 주보로 모신 것은 1977년 5월 18일 이곳 조원동주교좌성당을 신축·봉헌하면서다. 당시 교황청 인류복음화성(현 교황청 복음화부) 장관 아넬로 로씨 추기경은 7월 9일 평화의 모후 축일에 「수원교구 새 주교좌 및 준주교좌성당 인준 포고문」을 발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를 수호자로 모신 새 성당에 주교좌를 두도록” 인준했다. 교구 새 주교좌의 주보 성인을 ‘평화의 모후’로 삼으면서 교구의 주보도 ‘평화의 모후’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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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성당 내부. 이승훈 기자

‘평화의 모후’ 주보로 1977년 봉헌
왜관수도원 남도광 신부가 설계한
사선·정방형의 독특한 내부 구조
전례 참여 위한 ‘열린 공간’ 상징

■ 신자들에게 열린 공간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일반적인 성당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의 공간이 나타났다. 왼쪽보다 오른쪽이 높은 사선 형태의 천장이 눈길을 끈다. 상대적으로 높은 오른쪽 벽면에는 창문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자리하고 있어 성당 오른편에서 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형상이었다.

공간 자체가 정방형에 가까운 것도 인상적이다. 일반적으로 성당은 앞뒤가 긴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에 비해 정방형 공간, 그리고 제단이 신자들을 향해 둥글게 튀어나온 모습은 신자들에게 더욱 열린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런 성당의 모습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남도광 신부(南道光·호노라토 밀레만 Honoratus Millemann)의 설계로 만들어졌다. 한센병 환자와 소외된 이웃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것으로 유명한 남 신부는 성당설계도 하곤 했다. 특히 1960년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사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신자들의 전례 참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성당 건축에 앞장서곤 했는데, 남 신부 역시 그런 흐름 안에서 조원동주교좌성당을 설계했다.

건축 당시만이 아니라 성당에 담긴 열린 공간으로서의 정신은 이후 성당을 리모델링 해나가는 과정에도 반영돼 왔다. 특히 2019년에는 성당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면서 정문 위치를 조정하고 외부 공간을 답답하게 했던 주변 시설들도 정비하면서 더 넓은 입구로 많은 이들을 맞아들이는 형태로 바뀌었다. 신자들이 소통할 수 있는 대강당과 교육관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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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성당 십자가상.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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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성당 내부. 이승훈 기자

■ 교구의 공동주교좌성당

성당 제대를 바라보니 제대 뒤 벽면에 삼위일체와 칠성사를 상징하는 모자이크가 펼쳐져 있었다. 1977년부터 20년 동안 세례성사에서부터 주교가 주례하는 견진성사와 성품성사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일곱 성사가 이곳 조원동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됐다.

교구는 설립 당시 고등동성당을 주교좌성당으로 삼았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교세를 생각하면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 고등동성당의 규모는 교구 행사를 치르기에는 협소했다. 이에 새롭게 준비한 성당이 조원동주교좌성당이었다. 기존에 있던 성당 중에서 선택된 고등동성당과 달리 처음부터 주교좌성당으로서의 위상을 염두에 두고 세워진 것이다.

조원동에 주교좌를 둔 교구는 더욱 빠르게 성장했다. 1976년 교구 신자 수는 5만 명가량에 불과했다. 그러나 20년 사이에 신자 수는 40여 만 명으로, 8배나 증가했다. 그렇게 크게 성장하는 교구의 중심에는 조원동주교좌성당이 있었다.

교구는 1997년 새 교구청과 새 주교좌성당인 정자동주교좌성당을 세웠다. 비록 새 주교좌성당이 생겼지만, 조원동주교좌성당은 교구의 공동주교좌성당으로서 여전히 주교좌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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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성당. 이승훈 기자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