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묵시 3,1-6)

우세민
입력일 2025-03-12 08:47:02 수정일 2025-03-12 08:47:02 발행일 2025-03-16 제 3433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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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 있는 듯 행동하지만 실천 없는 신앙 생활 지적
저 혼자 배부른 삶 아닌 더불어 행복한 삶 꿈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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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사르디스교회가 있던 유적 가운데 성당과 아르테미스신전이 있던 자리.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한때, 아시아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던 사르디스는 서기 17년 큰 지진으로 황폐한 곳이 되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사르디스의 재건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고 과세를 면제하기도 했다. 물론 황제를 위한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다. 유다인들의 영향력도 제법 강한 곳이어서 사르디스의 공적인 일들에 유다인들의 참여 또한 활발했다.

사르디스에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묵시 3,1)다. 1장 4절에 일곱 영은 하느님의 성령을 가리키고 1장 20절에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대표격인 일곱 천사를 지칭한다. 하여 사르디스가 소개하는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교회,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절대적 주권을 지닌 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은 사르디스 공동체가 ‘한 일’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 일이란 게 좋은 일, 모범적인 일이 아니다. 사르디스 공동체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 스스로 살아 있다고 여겼으나 사람의 아들은 ‘너가 죽어 있다’고 직격하기 때문이다.(묵시 3,1) 사르디스가 ‘한 일’은 죽음을 가리키는 상징이었던 셈이다. 무언가 해내고 있는데,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오히려 자멸하게 만드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빌려오면 이렇다.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여도 신심의 힘은 부정할 것입니다.”(2티모 3,5) 신심 있는 듯 행동하지만 자신과 돈, 그리고 제 욕망을 추구하는 일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가리켜 사도 바오로는 ‘신심의 힘’을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사도 야고보도 마찬가지 말씀을 남긴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야고보서가 말하는 실천은 ‘형제애’와 관련된 것이다. 저 혼자 배부른 삶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것이 믿음이 걸어 나가는 ‘생명’에로의 길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묵시 3,2) 깨어있음은 두 눈 부릅뜨고 제 인생을 갈고 닦는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제시된 명령이 아니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으로 규정된 사르디스 공동체가 깨어있음을 실천해서 얻어 내야 할 것은 ‘생명’이고 그 생명에로의 추구는 결국엔 서로에 대한 개방과 환대의 실천 유무에 달려있다. 3장 3절의 ’회개’라는 말마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근대 이후 사람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개인’의 가치가 도드라지게 되면서, 회개라는 말마디를 개인적인 반성이나 성찰의 관점에서 해석해 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본디 회개는 ‘서로를 향해 돌아선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타자성’을 빼놓고선 회개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회개는 사람됨의 근본 이유이자 목적일 수 있으리라. 사람은 ‘사회적 관계’ 안에 살아갈 존재이고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사람다움을 이야기하고 실천하고 다듬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사르디스에 보내진 편지를 읽으면서 주목해야 할 동사가 있다면, ‘받아들이다’라고 번역된 ‘람바노’(λαμβάνω)가 될 것이다.(묵시 3,3) 요한복음은 육적인 완고함이나 배타성에서 해방되어 복음에로 열려 있음을 논할 때 이 동사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깨어있을 수 없다. 회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또 한 번 빌려오자.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3-14) 듣고 받아들이는 것을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 여기며 저 혼자 기도하고 묵상하는 일은 저만의 외로운 고행이 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저 혼자만의 신앙에 대해 경고했다. 선포하는 이, 그리고 듣는 이의 형제적 친교와 일치 안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복음서에서 여러 번 강조되기도 했다. 하느님 나라는 저 천상에 홀로 고립되어 있어 몇몇 의인이나 영웅들에게만 드러나는 밀교의 왕국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 한가운데 이미 드러나 있다.(루카 17,20-21)

깨어있음을 살아내야 할 사르디스 공동체가 여전히 죽어갈 때, 곧 스스로 유폐되어 서로를 향한 회개를 살아내지 못할 때, 사람의 아들은 ‘도둑’이 되어 ‘갑자기’ 나타나신다.(묵시 3,3) 사람의 아들이 ‘도둑’처럼 온다는 표현은 전형적인 종말의 심판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도둑’으로 만나서는 안 될 일이다. 신앙인이 살아내야 할 회개의 자리, 친교의 자리는 예수님이 ‘도둑’이 아니라 ‘벗’으로서 다가서는 자리이므로. 믿음을 시작한 이래, 우리는 부족할지언정 스스로를 더럽히진 말아야 하겠다. 말하자면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겠다.(묵시 3,4) 14장 4절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14만4000에 대해 말한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는 이들은 흠도 결도 없이 오로지 예수님 안에 더불어 살아간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생명의 책에 이름을 올리는 이들이다. 놀라운 일은 예수님을 향하는 것이 비로소 스스로의 이름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그런 이들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기 때문이다.(묵시 3,5)

사르디스는 지진 후 다시 살아난 도시였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역사적 자료가 희박하여 사르디스라는 도시가 지녔던 재건에의 역동성과 그 희망에 대해 추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주석이 힘들면 해석의 상상력을 펼쳐보면 어떨까. 저마다 ‘한번 해 보자’며 미래의 달콤한 삶을 향해 덤벼드는 분위기, 거기에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했던 유다인들 마저 도시의 공적인 일에 열심히 뛰어드는 분위기, 그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어떠해야 할까. 저마다 희망을, 노력을, 성공을 이야기할 때, 그리스도인은 희망 뒤편에 쓰러진 절망의 사람들을 살려야 하지 않을까. 저마다 무언가 해내야만 한다고 핏대를 올리며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아무 일도 못 한 채 하루를 버텨내는 이들에게 ‘회개’라는 일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도시의 재건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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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