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넘어온 빛과 희망…한국교회 산증인으로 함께한 100년 성찰
1927년, 일제의 억압적 식민통치 아래에서 우리 민족은 숨쉬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일제는 온갖 수단으로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 했고, 경제적인 수탈이 극심해졌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탄압은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확산의 계기가 됐습니다. 특히 그해 11월 시작돼 전국적인 학생 시위로 확대된 광주학생운동은 이후 1930년대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혹독한 억압의 시기, 그해 4월 1일 한 줌의 젊은 평신도들이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회보’를 창간했습니다.
오는 2027년은 가톨릭신문 창간 100주년입니다. 이를 2년 앞두고 가톨릭신문, 그리고 한국교회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총 100회 남짓 이어질 성찰에 독자여러분의 깊은 관심 바랍니다.
교회와 민족과 함께한 100년
한국 가톨릭 언론의 효시가 된 작지만 소중한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어 2027년 창간 100주년을 2년 남짓 남겼습니다. 평신도들의 자발적 신앙의 수용으로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이 1784년의 일입니다. 가톨릭신문이 그중 100년을 함께했으니 한국교회 역사의 거의 반을 함께 살아온 셈입니다. 게다가 지난 100년은 유례없는 격동의 시기였기에 가톨릭신문의 역사는 교회와 민족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복음 선포의 증언과 민족적 사명
이는 교회의 복음선포에 대한 증언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 자비 속에서 참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민족을 이끌어야 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민족적 사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전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신앙 수용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졌습니다. 선조들은 유교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탐구한 서학으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박해를 겪어내면서 평등한 세상에서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교회는 박해의 끝에 신앙의 자유를 얻어냈지만 숨을 고르기도 전에 일제의 억압 속에서 민족과 함께 다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해방의 함성이 잦아들기도 전에 민족은 외세에 의해 허리가 잘려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 했고, 분단된 조국에서 교회는 독재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나섰습니다.
빛과 그림자
험난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역사 안에서, 빛과 희망은 물론 때로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어두운 그림자도 발견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생존과 존엄보다는 교회의 존립을 우선시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교회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일제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합니다. 분단된 조국에서, 멸공 이데올로기를 신봉함으로써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저해했다고도 합니다.
독재에 대한 저항을 통해 한국교회는 양심의 보루가 됐습니다. 독재와의 투쟁에 몸 사리지 않음으로써,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가장 빛났습니다. 조선시대 왕조의 억압과 수탈 속에서 고통받던 민중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듯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복음적 실천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역사적 평가를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의 기준으로만 내릴 수 없습니다. 모든 사건과 인물은 시대의 한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빛과 그림자가 모두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역사를 목격하고 증언했던 가톨릭신문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유례없는 격동 휘몰아친 근현대
교회·민족과 생사고락 함께하며
창간 100주년 맞는 가톨릭신문눈부시게 성장한 교회와 함께
새로운 100년 역사 밑거름 될 것
한국교회와 가톨릭신문의 역사를 성찰하기에 앞서 한국교회의 역사, 특히 가톨릭신문이 취재하고 보도했던 지난 100년의 한국 교회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분단된 조국
가톨릭신문이 ‘천주교회보’라는 이름으로 창간됐을 때 문맹률은 80%였습니다. 여기에 교회는 작고 보잘것없었음을 생각할 때, 가톨릭신문을 창간한다는 것은 만용에 가까웠습니다. 교회는 1895년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1910년 한일합방까지 매년 7%의 교세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이후 해방 전까지 2.73%에 머물렀습니다. 일제의 억압 때문이었지만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 교회에 대한 실망감도 작용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교회는 선교와 사회사목 활동에 적극 임했고, 청년운동과 가톨릭액션이 활발해졌습니다. 하지만 북한교회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고, 곧바로 발발한 전쟁으로 전체 교회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에서 멸공 이데올로기는 지배적인 이념이 됐습니다. 외국 교회의 지원에 힘입어 성당 건립과 사회사업, 교육사업이 활기를 띠고 이는 신자 증가율에 크게 기여, 50년대 신자 증가율은 무려 연 16.5%에 달했습니다.
교회 쇄신과 사회정의 실현
1962년 10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려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내적 쇄신을 일깨우고 세상을 향해 창을 열라는 공의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쇄신과 세상에 대한 봉사, 사회적 책임을 일깨웠습니다. 이는 인권 수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교회는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 우리 사회 최후의 양심으로 자리 잡아 민주화를 주도했습니다.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예언자적 소명 실천과 함께 대규모 종교집회에 의해서도 이뤄졌습니다. 두 차례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과 순교자 103위 시성식 등을 통해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지명도가 높아졌습니다. 이는 폭발적인 교세 신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질적 성숙의 요구와 제삼천년기
90년대 들어 교회는 양적 성장에 걸맞은 질적 성숙이 요구됐습니다. 성장이 둔화하고 높은 냉담률과 저조한 성사 참여율이 고착됐습니다. 성장 요인들의 효과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고, 교회의 체제유지적이고 중산층화된 모습은 복음적 공동체의 매력을 퇴색시켰습니다. 이후 뚜렷한 사목적 돌파구를 발견하지 못한 채 제삼천년기를 맞게 됩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제삼천년기 새 복음화의 기치를 올리며 쇄신과 변혁을 꾀하던 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이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보편교회 전체의 깊은 고민을 가져왔습니다. 2019년 중국에서 시작돼 수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감염병은 우리 사회와 교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그 뿌리부터 성찰하게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빈발하는 전쟁과 기후위기 등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도전들에 대해 교회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종 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즉위했습니다. 전 세계에 충격을 준 교황 사임 후,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면모를 제시했습니다. 그러한 고민들에 대한 가장 총체적인 논의의 장으로서, 교회는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세계주교시노드를 개최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세계교회와 함께, 시노드의 결과를 바탕으로 자기 쇄신과 세상을 향한 봉사에 기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