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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5) 중세시대 필사화가

입력일 2003-05-25 수정일 2003-05-25 발행일 2003-05-25 제 2349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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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과 맞바꾼 책 한 권
구텐베르크가 1445년에 발명한 활판 인쇄술이 성서를 널리 보급하고 문맹을 퇴치하는 데 큰 몫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덩달아서 기사와 귀부인의 연애담 따위를 담은 세속 문학작품들도 베스트셀러로 떠오른다. 기회를 놓칠새라 약삭빠른 상인들은 종이를 사재기하거나 거래를 담합해서 치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책값이 안정되면서 누구나 몇 권쯤은 부담 없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 이전에는 책이 얼마나 비쌌을까? 거래 장부나 영수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796년 스페인에서는 합창곡이 수록된 악보 한 장이 소 두 마리 값에 응당하는 3솔리디를 호가했고, 1074년에는 어떤 수사가 미사 전서 한 권을 받고 잘 가꾼 포도밭이 들어선 야산 하나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15세기 독일에서는 설교집 한 권이 양 200마리에다 보리와 호밀을 수십 가마 얹어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물론 평범한 책이 아니고 화려한 세밀화가 빼곡이 들어 있는 양피지 장정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중세 시대에는 책 한 권으로 성 한 채 혹은 장원 하나와 맞바꿀 수 있었다고들 했다.

양피지라고 하면 흔히 「페르가멘트」를 말한다. 기원전 2세기 에우메네스가 페르가몬을 통치할 때 가축의 가죽을 벗겨서 가공하는 방식이 처음 발명되었다는데, 도시이름을 따서 페르가멘트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꼭 양의 가죽만 되는 것은 아니고 염소 가죽도 썼다. 북유럽에서는 암소 가죽을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소 한 마리를 잡아봐야 가로 세로 두어 뼘 짜리 양피지 한 두 장 나오는 게 고작이라서, 웬만한 복음서 한 권 제작하려면 200~ 300마리의 소를 잡아야 했다.

벗긴 가죽은 석회 물에 잘 빨아서 기름기를 빼고 경석으로 문질러서 부드럽게 결을 다듬었다. 마지막으로 안료가 고루 먹도록 횟가루를 곱게 쳐서 바탕작업을 하면 준비가 끝난다. 이제 안료를 풀어서 그림을 그리는데, 안료에 점착력을 더하기 위해 달걀 흰자나 나무 진액을 섞었다. 금박을 붙일 때는 꿀을 풀 대신 사용했다. 파피루스는 수명이 기껏 100~200년이지만 양피지는 열 배 이상 오래 견디는 데다 잘 안 구겨지고 질겨서 인기가 높았다.

중세 시대에는 글을 쓰는 필사가(miniator)와 그림을 그리는 필사화가(illuminator)의 역할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작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긁개로 가죽을 다듬어 펴고, 밑그림을 치고, 안료를 바르는 채색 작업은 수도원 필사실(scriptorium)에서 여럿이 공동작업으로 진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런 비싼 책을 누가 주문했을까? 보통 사람은 엔간해서 엄두를 못 냈고, 황제나 왕, 최소한 수도원장쯤 되어야 명함을 내밀 수 있었다. 주문할 때는 아무개 성인에게 헌정한다고 구실을 달지만, 결국 제 손에 들어오니까 주문자가 곧 소유자가 되는 셈이다. 특히 책 없는 수도원은 잎 없는 나무와 같다는 15세기 바젤의 수도자 야콥 루버의 말마따나 수도원에서는 책을 앞다투어 수집하고 자랑했다. 그리고 서로 돌려읽고 필사했다.

가령 1150년 수도원장 고트프리트 폰 아드몬트는 이웃의 수도원장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예루살렘의 파괴,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대의 승리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실은 책을 혹시 그쪽 수도원 도서관에 비치하고 있다면 빌려주기 바라네… 제대로 연구를 해보고 싶으니… 필사를 하고 반드시 돌려줌세』

필사화가들은 15세기까지도 제작자의 서명을 남기는 일이 드물었다. 이것은 같은 시대 세속 화가들이 서명을 통해서 명성을 좇고 후세에 떨치려고 했던 일반적인 경향과 크게 다른 점이다. 그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필사본들의 작업과 생산 계보를 분류하고 확인하는 일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 이들은 또 창의적인 실험보다는 원본에 충실한 모범적인 복사를 원칙으로 삼았고 작업교본에 실린 그림 표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제 솜씨를 뽐내고 명성을 따지기보다 한 몫의 노동을 모두의 수고로 돌리는 겸손의 덕목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자부심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심지어 성서를 베끼는 일이 영혼의 죄를 씻을 만큼 경건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필사가 라둘프는 제 손으로 해치운 작업 분량만큼 지옥 불에 떨어질 죄악이 면제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털어놓는다.

『책을 베끼는 동안 성 베다스투스가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며 내가 펜으로 글자를 얼마나 옮기나 헤아리셨다. 낱장마다 들어가는 문장의 행을 꼽으시고, 날카로운 점을 몇 개나 찍는지도 세어보셨다…. 이 책에 들어 있는 글자와 글줄과 점의 수만큼 나의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필사가와 필사화가들 사이에는 신기한 기적과 전설도 많이 전해진다. 아른스베르크에서는 영국 출신의 부지런한 수사 리처드가 있었는데 수고의 보상을 이 세상에서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에 좋은 자리에 묻고 스무 해가 지난 뒤 무덤을 열어 보았더니 그의 생명이 붙어 있던 육신은 모두 썩었는데. 오른손 하나만 생전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또 레겐스부르크의 수사 마리아누스는 밤늦게 작업실에 붙어 있으면서 불도 켜는 법이 없었다. 일을 할 때는 오른손에 펜을 쥐고 왼손은 높이 들고 있었는데, 그의 손가락 세개가 환히 빛나면서 등잔이 따로 필요 없었다고 한다. 꼭 이런 기적이 아니라도 필사화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찬양과 기도의 수단으로 여겼다. 필사화가 후고는 제 이름을 책 귀퉁이에 조그맣게 써넣으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입술로써 찬양하나, 후고는 금세공의 기술을 가지고 찬양합니다』

세비야의 이시도루스가 쓴, 「에티몰로기에」에 실린 그림. 프뤼페닝에서 1160~ 1165년 제작, 뮌헨 바이에른 국립도서관 소장. 위 그림은 책의 저자 이시도루스와 브라울리우스. 아래 그림은 필사화가 슈비허의 영혼을 두고 다투는 천사와 악마. 프뤼페닝 수도원의 필사화가 슈비허는 죽어서 누워 있는 모습이다. 미카엘이 저울을 들고 그가 만든 책의 무게를 달아본다. 마귀가 슈비허의 영혼을 노린다. 『주여. 가련한 필사화가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죄의 무게를 달지 마소서. 저의 선행은 비록 보잘것 없으나 죄를 덮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밤은 낮이 오면 물러나고 죽음은 생명을 이기지 못하니, 부디 마귀를 물리쳐 주소서』라고 씌어있다.
「비블리아 모랄리제」(교훈성서)에 실린 그림, 37.5x26.5cm, 1220~1230년 파리에서 제작, 뉴욕 피어폰트 모건 도서관 소장. 위 그림은 프랑스의 여왕 블랑쉬 드 카스티유와 성 루이, 아래 그림은 책의 내용을 일러주고 있는 저자(왼쪽)와 이를 받아적고 있는 필사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