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침묵의 교회실태] 음성화된 신앙 생활도 탄압

입력일 2011-04-18 수정일 2011-04-18 발행일 1979-06-17 제 1159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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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 수도원은 김일성농대로 변모
다른건물은 탁아소ㆍ유치원 등으로
잔혹한 탄압으로 지상교회는 자취 감춰
원산철도 공장의「십가가 사건」-반 종교 투쟁의 구실돼
신자 자녀들은 교육 금지ㆍ발언권 박탈 등의 특별 제재 받아
6월 17일은 침묵의 교회를 위한주일-. 이날을 맞아 북한 괴뢰 도당으로 부터 모진 박해를 받고 급기야 교회까지 빼앗긴 북한교회의 박해상과 침묵 속에 있는 북한교회의 오늘날의 모습을 극동 문제 연구소의 자료를 통해 알아본다. <편집자 註>

북한은 해방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물론에 입각하여 종교를 阿片으로 규정하고 종교의「反共生理와 信仰熱」을 공산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사회주의의 최대의 적으로 단정、혹독한 탄압을 가하고 있다.

1959년 김일성(金日成)은「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해야 하는가?」라는 反종교 운동의 지침서에서『악질 종교인들이 종교의 간판 밑에 反 혁명적인 행위를 조작하며 종교적 사상을 우리들 속에 扶植(부식) 시키려고 기도(企圖) 하므로 이것과 철저히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북한은 강력한 종교탄압 정책을 해오면서 동시에 회유공작(懷柔工作)을 병행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8ㆍ15이전부터 북한지역에 종교적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탄압을 완화하면 종교인들이 반공운동의 주류(主流)가 될 것이고 또한 越南 종교인의 많은 잔류가족 친척 친지들이 北에 있기 때문에 이른바 방첩(防諜)의 필요라는 구실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를 종교 탄압의 조치로서 1946년 3월 토지 개혁시에 종교재단 소유 토지 1만5천1백95정보(町步)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종교인들에 대한 경제적 기반을 박탈해 버렸으며 1948년 이른바 산업국 유화로 종교단체의 기업체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고 종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했던 것이다. 북한은 동란(動亂)을 기회로 교회 예배당 사찰 중 대파(大破)된 것은 완전 철거하고 나머지 것은 도색 또는 개축하여 현재는 탁아소 유치원 창고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 집단의 종교인에 대한 탄압 정책은 전후에도 계속되어 강제노동 세뇌교육을 북한주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주입시켜 反 종교 선전과 반동분자의 굴레를 씌운 학살행위를 계속 감행하고 있다.

북한집단은 오늘날 전 주민을 핵심(核心) 부동(浮動) 적대(敵對)의 3대 계층으로 크게 大別하고 이를 다시 51개 계층으로 세분하고 있는데 적대 계층 중에는 종교인 중소상인 월남자가족 국군진주시 협력자 숙청자 舊인테리 및 지주자 본가와 그 자제를 말라하고 이들을 일반 감시와 특별감시로 구분하여 철저히 감시、통제하고 있다.

특히 종교인과 그 자제는 특수감시의 대상자로 등록되어 고등교육금지、농장공장에서의 발언권 등을 박탈당하고 있으며 가장 가혹한 제재를 받고 있다.

북한은 종전 舊헌법에서「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를 규정해 놓고도 종교인을 탄압해 왔으나 신앙 생활이 개별적으로 내면화 하고 있는 사실을 직시하고 이른바「요해사업 (了解事業)」명목으로 위협과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

그 뒤 1972년 12월에 채택한 신 헌법 55조에는「신앙의 자유와 反종교 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明文化하고 음성화한 신앙생활 마저도 발각되는 대로 무조건 처형하고 있다.

한편 1960년초 원산 철도공장에「십자가사건」이 발생 하였다.

이 철도 공장의 젊은 노동자 한사람이 작업이 끝난 후 목욕을 하려고 탈의실에서 옷을 벗다가 십자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공장에서는 매주일 마다 지정된 날짜에 작업 후 목욕을 하게되어있는데 그 날은 공교롭게도 예정일을 하루 앞 당겨 목욕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평소 이 사람은 목욕하는 날에는 십자가를 지니지 않고 출근 하였으나 갑자기 변경된 날짜에 목욕을 하게되어 사전(事前)에 간직한 십자가를 숨기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곧 공산당 알려지자 그 청년은 비밀경찰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던 중 심한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하고 말았다. 그 결과 원산시의 천주교 신자들의 대다수가 처형 또는 투옥 당하게 되고 소위 십자가사건은 북한 공산당으로 하여금 反혁명사건의 하나로서 反종교투쟁을 강화할 구실을 주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평북 운산군을 비롯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관련한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서 철수하기 직전인 1948년 12월부터 북한에서의 종교박해는 본격화 되었다.

북한은 1948년 12월 공산당원을 동원시켜 덕원수도원 경리책임자인 嚴 신부를 체포해간 후 며칠 뒤에 裵 수사를 연이어 체포해 갔다.

그들이 이처럼 아무 까닭 없이 성직자들을 체포해가면서도 그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종교 때문이 아니고 어떠한 정치적 범죄 때문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그후 그들은 본색을 드러내어 1949년 5월 8일에는 덕원교구의「사우에르 辛」주교와 수도 원장인 洪 신부ㆍ부원장 安 신부、그리고 신학교 철학교수 吉 신부 등 4명을 체포、투옥했고 그 2일 후인 5월 10일에는 야음(夜陰)을 틈타 신학교 교장 盧 신부를 비롯한 독일인 신부 8명、수사 22명과 한국인 신부 金致鎬 金宗洙 金利植 崔丙權 신부 등 4인을 체포하여 정치 보위부에 투옥하는 한편 한국인 신학생들과 수사 99명을 내쫓아 수도원과 신학교를 몰수했다.

수도원 및 신학교를 강점(强占)한 성물(聖物)을 하나도 남김없이 닥치는 대로 파괴했고 특히 십자가 석고상 등을 산산이 깨뜨려버리고 제의는 찢어서 수건을 만들고 성경은 모두 휴지로 사용하거나 불태워버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의 철저한 탄압정책으로 북한 공산당은 현재 그곳 바로 그 자리에 사리원 (沙盲院) 농과대학을 옮겨놓고 이를 金日成 농과대학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