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우리말 성서번역에 일생 바친 고(故) 선종완 신부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2-09-06 수정일 2012-09-06 발행일 1995-11-26 제 1980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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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각ㆍ말ㆍ행실, 성서대로 살아
한국교회 처음 구약 히브리어본 번역
메추라기 사육해 번역비용 충당
9개국어 능통… 성모영보수녀회 창설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성서학자를 손꼽아 보면 첫 번째로 고(故) 선종완(라우렌시오) 신부가 떠오른다.

한국 가톨릭 교회 최초로 구약성서 히브리어 본문을 우리말로 옮겨 「우리말 구약성서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한 선종완 신부는 선종한지 20여년이 다된 지금도 「한 생을 말씀으로 산 사제」로 존경받고 있다.

가톨릭신문은 성서주간 설정 10주년을 맞아 평생을 우리말 성서 보급에 투신했던 고(故) 선종완 신부의 일대기를 회고한다

「그는 일생을 성서 안에서 살았다. 모든 생각과 말, 행실, 모든 것을 성서에 준해서 행한 철저하게 성서에 미친 사람이었다」

동료 교수로서 선종완 신부를 회고한 고(故) 오기선 신부의 증언이다.

오기선 신부의 증언처럼 선종완 신부의 일생은 한마디로 성서에 미쳐 산 삶이었다.

선종완(라우레시오) 신부는 1915년 8월 8일 감원도 원주군 신림면 용암리 속칭 「용소막」이라 불리는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선치태(라파엘)와 모친 정치영(가타리나) 사이의 독자로 출생한 선신부는 1929년 원주에 있는 봉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봄 소신학교인 서울 동성상업학교에 10대1의 경쟁을 뚫고 입학했다.

소신학교를 다니며 평소 수도 성소에 꿈을 키웠던 선종완 신부는 2학년 때 김피득 신부의 권고로 일본 흑해도에 있는 트라피스트수도원에 지망하기 위해 학교를 자퇴했으나, 본당신부를 비롯해 부모와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2년후 다시 신학교에 복학했다.

선신부는 성서학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여자는 마귀같은 존재여서 유혹당하기 쉬우니 얼굴도 쳐다보지 말라」는 당시 신학교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방학이면 오랜만에 대하는 어머니의 얼굴조차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말을 할 때도 얼굴을 수이거나 옆으로 돌려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또 본당 성가대 지도를 맡거나 옆으로 돌려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또 본당 성가대 지도를 맡거나 여교우가 면담을 와도 결코 맞대면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이러한 여성 기피증(?)을 가진 선종완 신부가 성모영보수년원을 창설한다고 했을 때 선신부를 아는 모든 이가 놀랐다고 한다.

동료 신부와 수녀들이 선신부에게 여자수도회를 창립한 이유를 물으면 「남자들보다 꼼꼼한 여자라야 성서 번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해 선신부의 성서번역에 재한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선신부는 당시 소신학교 교사였던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의 영향을 받아 성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4복음서만이 우리말로 번역돼 있을 만큼 성서에 대한 연구는 미개척 분야였다.

대신학교에 들어간 선신부는 특히 성서학에 전념, 히브리어 교과과정이 없어 독학으로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공부해야만 했다.

이러한 외국어의 열성으로 선신부는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이태리어, 독어, 아르메니아어, 시리아어, 아랍어, 일어 등 9개 국어에 능통할 수 있었다.

1942년 2월 14일 용산신학교 마지막 졸업생으로 동기생인 박성춘(레오) 신부와 용산 예수 성심대신학교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선종완 신부는 일본에 3년간 유학을 떠났다가 해방 후 귀국, 1948년 현재 백남익몬시뇰ㆍ류영도 신부 등과 함께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선종완신부는 1942년 사제품을 받고 1976년 선종할 때까지 34년간의 사제생활중 10년은 해외 유학생활을, 나머지 24년은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로서 성서학을 강의했다.

교황청 직속 신학대학인 울바노 대학의 학위가 있어야만 선서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기에 선신부는 울바노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다시 안젤리꿈대학에서 신학 연구과를 수료한 후 1951년 로마 성서대학 연구과 2년 과정을 마쳤다.

1951년 로마에서 유학생활을 마친 선신부는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서연구 대학원에 입학, 1년간 성서학과 고고학을 연구했다.

이로써 선종완 신부는 예루살렘 성서연구 대학원에 입학하고 또 현대 성서학적 방법론과 성서 연구의 정규과정을 마친 첫 번째 한국인으로 기록됐다.

1953년부터 구약성서 번역을 시작한 선종완 신부는 1958년 6월 30일자로 첫째권인 「창세기」를 발간한 후 1963년까지 13권의 구약성서를 번역 출간했다.

선신부가 번역한 이 구약성서는 한국 천주교회가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구약성서였고 1977년 공동번역본이 발간되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유일한 구약성서이기도 했다.

선신부는 한국 교회사의 금자탑으로 기록된 이 구약성서를 번역하는 동안 교회 당국의 아무런 지원이 없이 「메추라기」를 길러 판 돈으로 번역비용을 충당해야만 했다.

구약성서 번역이 속속 출간되면서 반봉쇄수도회를 구상한 선종완 신부는 1960년 3월 25일 「성모영보수녀회」를 창설했다, 하지만 너무 가난해 수녀원을 토막집으로 짓고 고구마와 꽁보리밥, 강냉이 밥으로 끼니를 이러야만 했다.

1968년 공동번역 전문위원으로 위촉된 선신부는 간암을 앓으면서도 쉬지않고 성서번역 작업에 몰두하다 과로로 공동번역본 출시를 눈앞에 두고 1976년 7월 11일 향년 62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옛날 사제품을 받을 때 어머니가 지어준 붉은 제의를 수의 대신 입고 40년간 손때를 묻혀 왔던 불가따 성서와 함께 선종완 신부 유해는 과천 성모영보수녀원 묘지에 안장됐다.

이날 장례미사를 주례한 김수환 추기경은 「선신부의 죽음은 성서를 통해서 하느님께 해하나 사랑으로 인한 순교」라고 애도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