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불러온 사랑… 지옥서 영원한 사랑 되다 불륜으로 함께 살해되고 지옥행 단테, 이들을 동정심으로 보지만 이해하면서도 용서하지는 않아
단테는 사부와 함께 ‘모든 빛이 침묵하고 있는’ 제2 지옥으로 내려간다. 그 입구에서는 지옥의 심판관인 미노스가 죄의 종류에 따라 죄인들이 갈 곳을 정해주는데, 가는 곳의 숫자만큼 자신의 꼬리를 감았다. 이미 심판의 결과가 나와 있기에 미노스는 심판관이라기보다는 감옥의 관리자인 셈이다. 여기서 그럼 무절제가 일으킨 죄들 가운데 하나인 애욕의 죄를 살펴보기로 하자.
제2 지옥에서는 육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었던 죄인들이 그 육욕만큼 강한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벌을 받고 있다. 바람을 피운 죄이기에 바람으로 벌 받는 것일까? 애욕의 특징은 마치 회오리바람 같다는 데 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한다. “어떠한 사랑을 하느냐에 따라 어떤 인간이냐가 정해진다.”(「설교집」 96,1) “부당한 사랑을 욕정(concupiscentia)이라고 부른다. 그 대신 올바른 사랑은 애덕(caritas)이라고 부른다.”(「시편 상해」 9,5) “욕정은 ‘그것이 무엇이든 사랑하고픈 것을 사랑하는 사랑’이나, 애덕은 ‘사랑할 만한 것을 사랑하는 사랑’이다.”(「서간집」 167,4,15) 또 「신국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사랑이 있어 두 나라를 일으켰다. 자기 사랑, 하느님을 멸시하기에 이르는 자기 사랑은 지상국을 낳았고, 하느님 사랑, 자기를 비움에 이르는 하느님 사랑은 천상국을 낳았다.”(14,28) 리미니 군주의 아들인 잔초토와 1275년 정략 결혼한 라벤나 군주의 딸 프란체스카는 시동생 파올로와의 불륜이 발각되어 1285년 함께 살해당한다. 프란체스카는 단테가 지옥에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여인이다. 단테는 그녀를 지옥에 배치하면서도 그녀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무한한 동정심을 가지고 듣는다. 그러기에 보르헤스는 단테를 “자비로운 사형집행인”이라고 부른다. 이 모순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단테는 그녀를 이해하면서도 용서하지 않았다. 이는 비논리적이지만 진실에 가깝다. 사랑(Amor)은 이내 고귀한 마음에 불붙는 것. 이 사람은 빼앗긴 내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했으니, 그것이 아직 나를 괴롭힙니다. 사랑(Amor)은 사랑받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나는 멋진 이 사람에게 사로잡혔으니 그대가 보듯, 아직 나를 사로잡고 있소. 사랑(Amor)은 우리를 하나의 죽음으로 이끌었지요. (지옥 5,100-106) “사랑은(Amor)… 사랑은(Amor)… 사랑은(Amor)…”으로 시작하는 이 단락은 ‘사랑의 찬가’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구절이다. 첫머리를 반복하는 아나포라(anaphora)는 두 운명적인 사랑과 그 비극적인 결말을 구성한다. 사랑은 이내 고귀한 마음(cor gentil)에 불이 붙는다. 파올로는 이 사랑의 불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사랑받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에, 프란체스카는 자기를 사랑한 파올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당시 궁정 연애시의 전형이며, 프란체스카는 이 시와 시인들을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프란체스카는 자신도 파올로도 이 사랑에는 책임이 없다고 변명한다. 사랑의 힘에 맞설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충동적인 사랑(amor passione)은 두 사람을 하느님께 향하지 못하도록 닫아버린다. 단테의 「새로운 인생」은 바로 이러한 사랑을 노래했다. 마지막 행 ‘사랑은 우리를 하나의 죽음으로 이끌었지요’(Amor condusse noi ad una morte)에서 ‘하나의 죽음’(una morte)은 발음상 사랑(amor)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즉 사랑은 죽음을 불러왔지만 그 죽음도 역시 사랑이기에 사랑을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하나의 죽음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사랑은 지옥으로 떨어지며 역설적으로 영원한 사랑이 되었다. 단테는 이제 그 충동적 사랑의 시와 결별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으로의 변모를 위해 정신을 잃고 ‘시체가 넘어지듯이’ 쓰러진다. 지옥 편에는 단테가 실신하는 장면들이 몇 군데 있다. 그 실신은 무엇을 말하는가? 「단테 신곡 강의」에서 이마미치는 말한다. “인간은 그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다. 어떤 것을 꼼짝 않고 쳐다보고 있다가 발광할 것만 같을 때, 인간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커다란 은총이다.” 박상진은 「사랑의 지성」에서 아감벤(G. Agamben, 1942~)의 말을 빌어 말한다. “실신은 그러므로 발광을 막아주는 자동제어장치와도 같다. 순례자는 지옥의 영혼들을 보면서 끝없는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지만 (…) 이 슬픔은 정확히 말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상태라는 의무로부터 물러서는 어지럽고 두려운 후퇴인 것이다. 단테가 지옥에서 기절하는 것은 자신의 의무를 너무나 벅찬 것으로 만드는 지옥의 끔찍한 광경을 이기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 도망가고 싶었을 테지만 (…) 스스로에게 주어진 의무의 전면적인 파기를 도저히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절하면서 잠시 의무를 보류하고자 한다.”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를 들으면서 프란체스카의 사랑의 찬가를 읊조려보자. 그대 또한 단테처럼 실신할지 모른다.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