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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⑫ 자유로 가는 순례길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입력일 2021-06-08 수정일 2021-06-08 발행일 2021-06-13 제 324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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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 순례의 목표, 죄의 굴레로부터 해방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얻은 현세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순례, 약속된 땅 향한 여정
모든 그리스도인은 순례자 참된 자유 향한 길 떠나야

베키에타 ‘천사 뱃사공’(1445년경).

연옥 입구를 지키는 파수꾼은 우티카의 카토이다. 현명·정의·용기·절제의 추요덕(樞要德)을 의미하는 성스러운 별 네 개의 빛살이 그의 얼굴을 장식하고 있다. 카토는 기원전 49년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정의 자유를 지키고자 폼페이우스 편에 선다. 그리고 파르살리아 전투 후에 그는 아프리카에서 스키피오 편에 가담하였으나, 아프리카가 전체가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자 생포되는 것을 불명예로 여겨 명예롭게 자결하였다. 그는 죽기 전날 밤 플라톤의 「파이돈」(영혼불멸론)을 밤새 읽었다고 한다.

카토는 자살하였고 이교도이며 로마제국의 건국자인 카이사르의 적이므로 우리는 그가 브루투스나 카시우스와 함께 지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연옥에 있고 언젠가는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단테는 카토를 자유를 위해 순교한 자로 받들고 있다. 그리하여 죄를 씻음으로써 자유로워질 영혼들의 수호자로 삼았다. 단테는 「제정론」(2,5,15)에서도 카토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표현한다.

“자유를 가장 엄정하게 수호한 인물로 카토의 형언 못 할 희생도 있다. … 카토는 자유에 대한 사랑을 세상에 불사르기 위하여 자유가 얼마나 값진가를 보여주었다. 즉 자유 없이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자유로운 인간으로 목숨 버리기를 더 바랐던 것이다.”

지옥 편이 우정의 회복을 노래하고 있다면, 연옥 편은 자유의 회복을 노래한다. 죄의 종살이에서 진리로의 해방인 자유는 연옥 순례의 목표이다. 단테는 카토를 “오, 거룩한 가슴이여”라고 부르며 그를 자유의 상징으로 언급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카토에게 연옥 순례를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온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는 소중한 자유를 찾고 있으니, 자유를 위하여 삶을 거절한 사람은 알겠지요.(연옥 1, 70-72)

단테는 천국 순례의 끝에서도 자기를 구원의 길 마지막까지 인도한 베아트리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찬가를 드린다.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었던

그 모든 길, 모든 방법을 통하여

나를 종에서 자유로 이끌었습니다. (천국 31, 85-87)

부활 대축일 아침 바다 위로 천사의 배가 연옥 산으로 올라갈 영혼들을 싣고 온다. 배 안에서는 연옥 해안에 도착한 영혼들이 성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In exitu Isarel de Aegypto)를 노래한다. 귀에 거슬리던 지옥의 불협화음이 연옥에서는 성가의 달콤한 화음으로 바뀐다. 이 성가는 두 시인이 연옥 산 정상을 향해가면서 앞으로 듣게 될 많은 성경과 전례 텍스트의 첫 번째이다. 성경 구절이 연옥에서는 재교육 프로그램의 중추를 형성한다. 이 「시편」(114)은 이집트와 죄의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감사하는 찬가이다.

단테는 「향연」(2,1)에서도, 자신의 회심의 예시가 되는 이 구절을 성경 해석의 전통에 결부시킨 적이 있다. 즉 이 한 구절에는 문자적 의미 외에도 우의적·도덕적·영적(천상적 혹은 신비적) 의미가 주어져 있다. 문자대로의 의미는 모세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했다는 것이다. 우의적인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속죄이다. 도덕적 의미는 죄와 슬픔과 비참함으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는 상태로의 영혼의 변화이다. 마지막으로 영적 의미는 현세 타락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깨끗해진 영혼이 영원한 영광으로 가득 찬 자유로 가는 길을 떠나는 것이다.

즉 이 영혼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주어진 현세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부터 순례라는 주제가 나온다. 참고로 단테는 「새로운 인생」(40)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을 부르는 고유한 이름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즉 예루살렘에 가서 기념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은 ‘종려 순례자’(Palmiere, 연옥 33,77), 로마가 순례의 목적지인 사람들은 ‘로마 순례자’(Romeo), 그리고 엄격한 의미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향해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만을 ‘먼 길을 가는 순례자’(Peregrino)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지옥에서의 여정을 순례라고 부른 적은 없다. 순례는 탈출이요, 삶의 새로움이며, 약속된 땅으로의 전진 운동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영혼들에게 “우리도 그대들처럼 순례자(peregrin)요.”라고 말한다. 성경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순례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히브11,13-14)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