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관생도 3학년이 돼 설렘을 한껏 품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임상 실습을 시작했지만, 기대와 달리 임상 실습은 어렵고 어색했습니다. 혼자 성당에 앉아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과연 임상이 적성에 맞는지를 고민하던 어느 날, 제가 실습 중이던 중환자실로 북한군 두 명이 입원했습니다. 표류하던 그들을 우리 군이 구조했는데, 저체온증에 폐렴, 영양실조까지 건강 상태가 너무 나빠 입원부터 한 것입니다.
말로만 듣던 북한군을 직접 만나 간호하다니! 살짝 긴장감도 느껴졌습니다. 중환자 간호장교인 이 대위님을 따라 열일곱 살, 환자 A를 만난 저는 “학생 간호사입니다”라고 첫인사를 했는데 생도라고 적힌 제 명찰을 본 그가 갑자기 큰소리로 “나를 바보로 아는가? 사관생도, 내 조국의 간첩이라고 적혀 있잖네!”라고 말했습니다. ‘뭐라고?’ 비록 적군이지만 인도주의적으로 환자로만 바라보리라던 다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담당 군의관님과 간호장교님들께서 자신을 초지일관 성심껏 돌봐 주신 것에 마음이 열려서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A는 점차 군 의료진에게 먼저 말도 건넸고 특히 제게는 질문도 하며 제법 친해진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부식인 어묵탕을 먹다가 문득 제게 “이것은 무엇으로 만드냐”고 묻길래 “글쎄, 밀가루하고 생선살로 만드나? 사 먹기만 해 봐서 잘 모르겠네요” 했더니 대뜸 “누이도 못 먹어 봤구나. 이거 한번 먹어 보라”고 하지 뭡니까? “그 말이 아니라고!” 저는 어이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평범한 음식조차 생애 처음으로 맛보고 신기해하는 모습이 가엾고 안타까웠습니다.
또 한 번은, 제 손가락의 묵주반지를 가리키며 무엇이냐길래 “묵주, 기도하는 도구”라고 하니 “누구에게, 언제 기도하느냐”고 묻는 겁니다. “힘들고 슬플 때, 좋을 때도, 늘 하느님께 도와주십사 기도하지”라고 대답했더니, “하느님이 누구냐, 이유 없이 너를 돕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소리엔 어쩐지 고단함과 외로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런 A를 보며 저는 오히려 간호장교로서의 제 미래를 확신하게 됐고, 나의 간호를 받는 환자의 심신의 고통뿐 아니라 영적인 고통에도 함께하리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자 가족들을 위해 돌아가야만 한다는 그들의 희망에 따라 북으로 떠나던 날, 모두가 말없이 작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여기저기 뜯어진 자신들의 낡은 군복을 선임 간호장교인 류 소령님이 정성껏 꿰매 주시자 가만히 지켜보던 그들은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중환자실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헤어진 뒤 28년이 지나고 있지만 열일곱 살의 어린 북한군, 아니, 제 환자 A를 저는 지금도 기도 중에 가끔 기억합니다. 어느 성가에서처럼 ‘하느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의 오른편에 그늘 되시니 낮에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는 기도와 함께 말입니다.
※이번 호로 권영훈 중령의 병영일기를 마칩니다. 그동안 기고해 주신 권영훈 중령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