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18) 베아트리체와의 재회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입력일 2021-09-07 수정일 2021-09-07 발행일 2021-09-12 제 3261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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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상징하는 베아트리체의 재림
복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
구약 예언이 신약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와의 예형론적 연결 
단테만이 그녀의 표징 읽어

가브리엘 로세티, ‘베아트리체의 인사’(1859).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재회하는 연옥 편 제30곡은 「신곡」 처음부터 세어보면 63곡째이고, 그 뒤로 36곡이 남는다. 여기서도 삼위일체를 뜻하는 ‘3’이라는 숫자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곱 촛대가 이끄는 신비로운 행렬은, 천지창조부터 최후의 심판까지 인류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을 상징한다. 행진의 목적은 지상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비로운 행렬이 축하하는 것은 그리스도로서의 베아트리체의 재림이다. 단테가 「새로운 인생」의 연인을 하느님의 아들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동일시는 천국 편에서도 나온다.

하지만 베(Be)와 이체(ice) 소리만으로도

나를 온통 사로잡는 존경심은 마치

꾸벅꾸벅 조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게 했다. (천국 7,13-15)

베(Be)는 복된(beato)을, 이체(ice)는 예수 그리스도(Iesus Christus)를 의미한다. 슈나프(J. Schnapp)는 「연옥 편 입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변모가 개인성, 역사성, 성별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그리스도-타입(a Christ-type)이 되는 것이며, 그의 대역(代役)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리고 동시에 그 누군가가 되는 것이다. … 단테의 베아트리체는 그러한 존재이다. 13세기에 그녀가 피렌체의 거리를 거닐고 있을 때, 단테만이 그녀가 지닌 표징의 깊은 의미를, 그리스도와의 예형론적 연결을 읽을 수 있었다. 그 표징은 그녀의 지상적 실존에 동반한 신비수(神祕數) ‘9’였다. 그녀의 표징은 연옥 산 정상에서 그리스도-발생(Christ-event)으로서 드러났다.”

다음 세 라틴어 구절이 그리스도로서의 베아트리체의 재림을 나타낸다.

▲스물네 명의 장로 가운데서 솔로몬 서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나의 신부여, 레바논에서 이리로 오너라”(Veni, sponsa, de Libano)(아가 4,8)(연옥 30,11)를 노래하며 세 번 외치자 나머지 모두도 따라 하였다. 여기서 신부는 교회가 아니다. 수레인 교회는 이미 행렬 안에 있다. 「아가」의 신부는 하느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하느님의 지혜는 사실 베아트리체가 가진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호응하여 “성스러운 수레 위로 백 명도 넘는 영원한 생명의 심부름꾼과 전령들이 일어나” 즉 천사들의 무리가 일제히 “오는 그대여 복되어라”(Benedictus qui venis)(연옥 30,19)라고 말하면서 위쪽과 주위로 꽃들을 던졌다. 100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뜻이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다니 7,10) 천사들이 심판하러 오는 베아트리체의 도래를 알리듯이, 그리스도도 그분의 능력 있는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2테살 1,7). 남성형으로 되어있는 천사들의 환영사는 주목할 만하다. 이 구절은 본래 「시편」(118,26)에서 온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오시는 분은 그리스도인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그리프스의 형상으로 와 있다. 그러면 베아트리체인가? 그렇다면 왜 여성형(benedicta quae venis)이 아닌가? 우리가 주목할 것은 베아트리체가 마치 그리스도인 것처럼 ‘복되다’라는 단어가 남성형이라는 점이다. 마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처럼 늠름한 여왕의 풍채를 갖춘 베아트리체가 강림하는 것이다.

▲“오, 한 움큼 가득히 백합들을 던져라”(Manibus, oh, date lilïa plenis)(연옥 30,21). 이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6,883)에서 가장 슬픈 순간에 발해진 말이다. 로마를 건국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비극적인 대가인 젊은 마르첼루스는 가장 용감하고, 가장 선하고, 가장 명예로운 기대주였다.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이른 죽음을 역사가 인류에게 부과한 잔인한 희생의 상징으로 만든다. 그런데 단테는 여기서 독자를 십자가 책형의 전망으로 이끈다. 골고타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이러니를 알레고리로 바꾸고, 고전 비극을 그리스도교의 희극으로 바꾸고, 베르길리우스의 절망을 단테의 희망으로 바꾼다. 베아트리체는 죽은 자로부터 마르첼루스의 장례식의 꽃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무의미한 손실이 아니라 죽은 자의 영원한 부활이다. 베르길리우스에게 역사는 종종 악몽과 같았으나 단테에게 역사는 이제 즐거운 개선행렬이다. 이 라틴어 표현은 이제 곧 떠날 사부에 대한 단테의 존경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렇게 꽃들이 구름처럼 주위 한곳에 뿌려졌을 때 베아트리체가 도래한다.

하얀 베일에 올리브 나뭇가지를 두르고

초록색 웃옷 아래로, 생생한 불꽃색의

옷을 입은 여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연옥 30, 31-33)

하얀 베일은 신앙의 색이다. 초록색 망토와 관은 희망의 색이다. 그리고 망토 아래의 붉은 옷은 사랑의 색이다. 그녀는 행렬의 중심에, 승리의 수레 위에 있다. 올리브는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의 나무이다. 그리고 지혜는 신학의 왕관이다. 게다가 올리브 잎은 평화의 상징이다.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