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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24) 천국에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다

김산춘 신부(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입력일 2021-12-07 수정일 2021-12-20 발행일 2021-12-12 제 3273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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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세티 ‘단테의 사랑’(1860년).

이제 초점은 오로지 육화의 신비에 집중된다. 우리의 사멸할 육체가 어떻게 삼위일체의 제2위인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 육체로부터 부활하였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1코린 15,49)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마치 기하학자가 원을 측정하려고

집중력을 다 쏟아 부어도 자신이 구하는 원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그 새로운 광경 앞에서 내가 그랬다.

나는 그 모습이 이 원과 어떻게 합치되고

어떻게 그 안에 들어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내 날개는 거기에 충분하지 않았다.(천국 33, 133-139)

육화의 신비를 이해해 보려고 하는 것은, 마치 기하학자가 원을 측정하기 위해 원을 사각형으로 만들어보려는 헛된 시도와도 유사하다. 「제정론」(3,3,2)에서도, 「향연」(2,13,27)에서도 같은 말이 나온다. “원은 그 원호(圓弧)로 인해 완전하게 사각형으로 만들 수 없고, 따라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어떻게 인간의 육체와 그 형상은 신성이라는 원 안에 들어맞을 수 있을까? 육화의 신비의 한복판에는 같은 척도로는 측정할 수 없음이 있다. 즉 말씀과 육(肉)은 같은 척도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말씀이 육이 되었을까? 만일 독자가 단테라면 어떻게 하느님을 제시할 수 있을까? 성부는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노인일까? 성자도 많은 회화에서 보듯이 그와 같은 사람 모습일까? 성령은 비둘기일까? 「신곡」을 그와 같은 모습의 환시 안에서 끝맺어야 할까? “단테는 인간을 초월하는 것을 말할 수 없다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여전히 인간의 언어로 토로하면서 언어의 한계를 확장하고 있다.”(박상진 「사랑의 지성」 241쪽)

단테는 이처럼 천국 편에서 대담한 독창성과 그 불가능함의 고백, 환시를 형언할 수 없음과 말해 보려는 언어의 부적합성 사이에서 진동하며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맛보게 한다. 다만 내 정신이 섬광에 맞은 듯했고, 그 덕분에 내 소망은 이루어졌다. (천국 33, 140-141)

순례자 단테의 날개 그 자체는 가장 깊은 신비의 환시로 자신을 들어올리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은 그 초월적인 지점까지 순례자의 시력과 이해를 끌어올리기 위해 개입한다. 순례자의 정신과 시력은 위로부터의 어떤 섬광에 의해 고양된다. 최상의 은총을 통하여 그에게 바라던 환시와 이해가 주어졌다.

성경은 지복직관에 도달한 사람을 ‘신성의 한 몫을 나눠 받은 사람’(2베드1,4 : koinōnoi) 이라고 말한다. 순례자는 긴 여정 끝에 섬광 안에서 환시를 보고 거기에 참여하고자 한 그의 지성의 열망을 이루었다.

여기 높이 날아오른 환상에 내 힘은 소진했지만,

이미 내 열망과 의지는 다시 돌고 있었으니,

균등하게 돌아가는 바퀴 같았다.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분이었다.(천국 33, 142-145)

순례자의 환시를 보려고 하는 지성의 열망(disio)이 갑자기 은총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그 상태는 복자들의 그것과 비슷한데, 복자들은 얼굴을 맞대고 영원히 하느님을 바라보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왜 단테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와야 했을까? 지복직관에서 눈을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데, 어떻게 그 바라봄에서 멀어질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명백하다. 그의 체험은 살아있는 인간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그의 무게’(천국 32,139) 때문에 그러한 고귀한 환상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는 신성 참여자가 되었다. 그리고 인생의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지복직관을 미리 맛본 것이다.

시의 마지막 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 바라봄은 지상에서 올려다본 우주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시의 마지막 행은 시선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다, 지상에서 별들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지옥 편과 연옥 편의 마지막 말이 ‘별들’이었던 것처럼, 천국 편의 마지막 말 ‘별들’(stelle) 역시 우리에게 위를 바라보고 살아가길 권하고 있다.

김산춘 신부(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